교육부, 지원 미루고 '옥죄기' 날개 꺾인 특목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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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가 학교 선택까지 관여하나요?"
외국어고에 다니는 아들을 둔 학부모 정모(46·여)씨는 요즘 속이 끓는다. 교육부의 잇따른 특목고 규제 발표 탓이다. 현재 외국어고는 어문계열 학과에만 특별전형 지원이 가능하다. 정씨는 "좋은 학습환경을 위해 외국어고에 보냈는데 원하는 학과에 갈 수 없다니 말이 되냐"며 "교육부가 탁상공론만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특목고가 외화내빈에 시달리고 있다. 교육부가 특목고를 사교육비 상승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특목고 때리기'의 수위를 높였기 때문이다. 최근 교육부는 '외국어고가 이과반을 운영해 의대.법대에 학생을 보내는 등 설립 목적을 위반하면 일반고로 강제 전환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특목고 붐을 잠재워 사교육 시장 범람을 잡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학부모와 학교는 "정부가 교육정책 실패를 특목고 탓으로만 돌리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 어학영재는 의사 못 된다?
교육부가 밝히는 외국어고 설립목적은 어학영재 양성. '설립취지에 맞는 운영'을 강조하지만 '어학영재'에 대한 규정에서부터 교육현장과는 목소리가 엇갈린다.
모 외국어고 3학년에 재학중인 김모(19)군은 "어학실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어문학계열에만 진학하라는 건 어불성설"이라며 "영어는 더이상 학문이 아닌 세계 공용어"라고 반박했다. 의과대학의 한 교수도 "원어 의학교재와 쏟아지는 학습량을 소화해내는 측면에서 특목고 출신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며 "어학 영재는 의료계에도 꼭 필요한 인재"라고 말했다.
하지만 교육부의 시각은 다르다. 특목고 입시가 과열되면서 사교육비가 높아진 만큼 특목고의 진학 규제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 교육부 관계자는 "외국어고가 어학영재 양성이라는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고 어문계열 진학 학생이 늘어난다면 사교육비가 크게 주는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지원은 없고 규제만
열악한 재정도 특목고를 옥죄는 요소다. 대부분의 자립형 특목고가 정부지원 없이 학생 등록금만으로 살림을 꾸리기 때문이다. 재단이 있다고 해도 교육사업에만 꾸준한 투자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일반 사립고의 경우 인건비와 시설비를 정부로부터 지원 받는다.
서울의 한 외고 교장은 "규정은 똑같이 적용하면서 재정 지원만 없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며 "학교발전기금조차 학교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고 털어놨다. 교육청 시행령에 따르면 학교발전기금은 학생의 교육 활동에만 사용해야 하고 시설투자 등에는 사용할 수 없다. 외국어고 신입생 홍모(17)양은 "학교 시설이 중학교에 비해 형편없다"며 "왜 특목고를 귀족학교라 부르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외국어고 관계자는 "각 교육청에서 관할 지역 학교를 대상으로 시설교체 신청을 받고 있지만 경쟁률이 심해 지원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라며 "대부분의 학교 기반시설이 낡아 교체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교사 확보도 문제다. 외국인 교사의 강사료도 고작 시간당 3만원이다. 적절한 대우를 못 해주니 수준 높은 교사를 영입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정부차원 지원만이 해결책
특목고의 현실극복을 위한 방안으로 전문가들은 '정부차원의 진흥기금 형성'을 제시한다. 유럽의 경우처럼 국가차원의 재정지원을 통해 특정 사립고를 세계적 명문으로 성장 시켜야 한다는 것. 한 외국어고 교장은 "국제교육진흥기금 같은 지원책을 마련해 엄격한 심사를 통해 지원하는 방안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기업체의 경우 당장 인재선발이 불가능한 고교에는 지원을 하지 않는다"며 "결국 정책적 뒷받침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덧붙였다.
특목고 규제가 국내 고교의 하향평준화를 유도한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모 교대의 교수는 "특목고 규제는 결국 전체 고교수준의 하향평준화를 가져와 국가경쟁력 마저 떨어뜨리는 원인이 될 것"이라며 "선진국이 오랜 기간 시행착오를 거쳐 얻은 교훈을 왜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프리미엄 라일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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