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린 대로 거두는 "흙이 좋아요"|꽃 키워 연소득 3천만원「서울 농사꾼」김대원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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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화려한 옷차림의 서울 사람들을 항상 대하면서 농사를 집어치우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도 있었지요. 그러나 뿌린 대로 수확을 하는 흙과 씨름하다보면 어느새 모든 시름이 사라집니다』
농사를 지을 경우 장가가기조차 힘든 세태 속에서도 거대도시 서울에서 남들이 마다하는 농업을 선택해 독 농가의 집에서 머슴살이까지 하면서 영농기술을 터득, 자신의 농장을 과학영농의 국제적인 교육장으로 만든 김대원씨( 39·서울 원지동 254). 서울시 농민후계자 16명중 한사람인 김씨는 5천여 평 크기의 농장에서 10여종의 꽃을 비닐하우스로 재배, 연간 5천만원 이상의 매출을 올려 3천여 만원의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는「일류 농사꾼」이다.
영농 경험부족으로 실패도 잇따랐지만 끝없는 도전과 실험정신으로 생산과 판매방법을 혁신해온 김씨의 농장에는 전국에서 매년 1천여 명의 젊은 농민후계자와 농고 생들의 견학이 줄을 잇고 있으며 88년부터 매년 대만 청년 농민단소속 농민후계자 20여명씩이 찾아와 김씨의 영농기술을 배우고있다.
지난62년부터 행정구역이 서울 원지동으로 변경된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세원리에서 가난한 농부였던 김천유씨(61)의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씨의 고교시절 꿈은 법관이 되는 것.
아버지가 힘든 농삿일을 물려주기는 싫다며 법과대학에 들어가 법관이 돼줄 것을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69년 은광고를 졸업, 명문대 법학과를 지망했으나 3년 연속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했다.
한동안 실의와 좌절 속에 죽음까지 생각했던 김씨는「일류 농사꾼」이 되기로 심정을 정리했다.
막상 일에 뛰어들었지만 재래식 농법으로 채소를 재배하던 아버지로부터는 특별히 배울 것이 없었다. 궁리 끝에 인근 독 농가의 집에 머슴으로 들어갔다.
인분지게를 지는 일부터 퇴비를 만들고 농약을 치는 일에 이르기까지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 어깨 너머로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재배법을 익혔다.
1년간의 머슴살이 끝에 72년부터 원지동 자신의 논·밭에 비닐하우스를 설치해 얼갈이 배추와 상추를 심었지만 74년과 80년 두 차례에 걸쳐 폭설로 하우스가 무너지는 시련을 겪었다.
83년 7월에는 코스모스백화점에 근무했던 부인 최성희씨(36)의 아이디어로 중간 상인들의 밭떼기 농간을 막기 위해 청담동 시장 내에 직판장을 열었다.
직판장개설은 기대이상으로 효과가 컸다.
중간상인들에게 돌아가던 마진이 고스란히 돌아와 판매이익이 두 배로 늘어났다. 84년 꽃시장조사를 마친 뒤 시험적으로 글라디올러스 2만 구를 심었고 85년부터는 꽃 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김씨가 고집스레 지켜온 고향마을 땅값은 평당 50만∼60만원 선으로 재산은 30억원 대에 이르고 있다.
남들은 30억원 짜리 땅을 소유한 부자가 뭐 때문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고생하느냐고 하지만 대지에 쏟는 땀의 소중함은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 김씨의 철학이다.
『대도시 변두리에 위치한 농장을 도시 어린이에게 흙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자연학습 농장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큰 꿈이라는 김씨는 자녀(3녀)를 모두 떳떳하게 영농후계자에게 시집보낼 계획』이라며 활짝 웃었다. <이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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