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지구촌 사람] 2. 홍콩 사스병동 의료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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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2003년의 충격과 공포는 전쟁과 질병이었다. 특히 지난해 늦가을 중국 광둥(廣東)에서 번지기 시작한 괴질은 중국.홍콩.싱가포르.대만 등 아시아 지역을 휩쓸고 태평양을 건너가 캐나다 등 서방지역도 강타했다.

괴질은 지난 3월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2003년은 사스가 지구촌에 데뷔한 해가 됐다.

중국을 중심으로 인류는 사스와 일대 전쟁을 벌였다. 감염 8천98명에 사망 7백74명, 그리고 심대한 경제성장 저하. 전투의 손실은 막대했지만 인류는 승리했다.

어느 전쟁이든 자신을 던진 용사가 있듯 대(對)사스 전선에서도 영웅들이 있었다. 사스 바이러스가 자신의 폐에 들어오는 것을 불사하면서 치료에 몰두하다 숨진 의사.간호사들이다. 그중에서도 최초 사스 사망자가 발생한 홍콩에서 영웅들의 살신성인은 세계인을 감동시켰다.

홍콩에서는 전체 감염자의 4분의 1가량(4백여명)이 의료진이었다. 그중 8명이 '전사(戰死)'했다. 사스와 사투를 벌인 1백여일간 홍콩에서는 단 한 건의 진료 거부도 없었다. 주간 타임지 아시아판은 4월 사스 전선의 의사들을 '아시아의 영웅'으로 선정했다. 타임은 "의료진의 희생정신으로 공포에 떨고 있는 아시아인들이 위로와 극복의 용기를 얻었다"고 평가했다.

'8인의 전사자' 모두가 가슴아픈 사연이지만 사스 병동에 자원했다 숨진 의사 셰완원(謝婉雯.여.35)은 특히 홍콩인의 가슴을 적셨다. 그녀는 지난 3월 말 사스 환자의 목에 고무호스를 끼워주다 감염돼 5월 13일 주룽반도 서쪽의 툰먼 종합병원 사스 병동에서 눈을 감았다.

謝는 흉부내과 의사였지만 사스 병동팀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스병동에 자원했고 촌각을 다투는 환자를 응급 처치하기 위해 앰뷸런스에 몸을 싣는 등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녀는 1986년 8월 27일 명문 홍콩 중문 의학원에 입학하던 날 일기장에 "나는 앞으로 사회와 서민을 위해 나를 바칠 것"이라고 적었다. 그녀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다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한편의 러브스토리였던 그녀의 결혼 생활도 남은 자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주위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한부 인생을 살던 백혈병 환자를 남편으로 맞았으나 그는 불과 2년 만에 그녀의 곁을 떠났던 것이다.

그녀보다 하루 앞서 사망한 남자 간호사 류융자(劉永佳.38)는 정부 병원 의료진 중 첫 희생자였다. 영결식장은 조화와 종이학, 하트 모양의 편지로 뒤덮였다.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홍콩인들이 줄을 이었다. 둥젠화(董建華)행정수반은 "홍콩은 영원히 이들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헌사하며 눈물을 흘렸다.

사스는 에이즈 이후 이렇다할 신종 전염병을 겪지 않았던 인류에게 중대한 시험이었다. 특히 식용을 위해 야생동물을 무분별하게 잡고 상대적으로 위생 관념이 철저하지 못한 중국에는 심각한 경종이었다.

아울러 중국 당국은 사스 바이러스 발생을 쉬쉬해 전염병이 전 세계로 퍼지도록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정용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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