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전모방 노조위원장 허태명씨(앞서 뛰는 사람들: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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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임투는 뒷전 알뜰살림 앞장/4백명 노조살림 혼자 꾸려/10년 무분쟁… 노사평화 실현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135 나전모방 노조위원장 허태명씨(46)의 하루는 매일 새벽 회사 구내식당 영양사와 같이 장을 보러 나서는 것으로 시작된다. 한정된 예산으로 근로자들에게 정갈하고 깔끔한 점심식사를 제공하기 위해 부식 구매를 업자들에게 맡기는 대신 노조가 직접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요즘 새학기 전 노조원의 중·고생 자녀 장학금 지급을 목표로 노조가 운영하는 사내 매점 및 코피자동판매기 수익적립금과 회사의 지원금을 놓고 주판알을 퉁기느라 여념이 없다.
임금협상철을 앞두고 다른 노조위원장들이 회사측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임금인상 요구안을 짜고 임투전략을 구상하고 있는 와중에 그는 이처럼 한가하게 보이는 일로 바쁘다.
『우리 근로자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회사에서 알아서 올려주겠지요. 우리도 나름대로 인상안은 만들겠지만 회사와 근로자들이 서로의 사정을 빤히 알고 있으니 양측의 안이 별 차이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나전모방 노조원들은 이런 허씨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3년 임기의 노조위원장을 세번이나 연임했고 지난달 18일 단독출마한 노조위원장 선거에서 다시 압도적 지지로 재선되었다.
『우리 근로자들이 먼저 게으름 피우지 말고 회사일을 제 일처럼 열심히 해야 돼요. 그래야 회사에 이익이 나고 근로자들도 해준 것만큼 돌려받을 수 있게 되지요. 근로자들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데도 회사가 할 도리를 안한다면 그때는 투쟁해야죠. 다행히 우리 회사에서는 노조가 설립된지 20년이 지났는데도 그런 일이 한반도 없었습니다.』
허씨의 이런 근로철학이 젊고 진보적인 근로자들에게 먹혀들 수 있는 것은 나전모방 노사가 처해있는 특수사정 때문이다.
나전모방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84년 5월 섬유업계의 불황과 수출제품의 클레임 변상 등으로 부도가 났다. 상황이 너무 어려워 사주(남재우 현 나전모방 사장)의 지시로 회사정리 작업이 시작되자 노조위원장 허씨를 중심으로 한 근로자들이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다같이 힘을 모아 회사를 살려보자』며 오히려 사주를 설득하고 나섰다.
허씨를 앞세운 노조간부와 경영진이 운영비 대출·수주를 위해 24시간 뛰어다니고 일반 근로자들은 최소한의 생계비만 받고 휴일도 잊은채 더좋은 제품 만들기에 땀을 흘리는동안 이들의 태도에 감명받은 각계의 지원이 보태져 회사는 정상화의 길로 들어섰다.
8월 대홍수로 공장과 기계가 물에 젖고 화재까지 발생,기숙사가 홀랑 타는등 시련은 그 후로도 계속됐지만 이들의 굳은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무난한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미스런 일로 중도하차한 전임 노조위원장의 후임에 추대됐던 허씨는 이 과정에서 은행장실에 단신으로 쳐들어가 무담보대출을 따내는등 숨겨진 지도력을 발휘,「특별한 사람」으로 노조원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게 됐다.
『그 일을 계기로 나전모방 노사는 너와 내가 아닌 우리가 됐지요. 87년에는 급진 노동운동가 몇명이 위장취업,세력을 규합하려다 「도저히 말이 먹혀들지 않는다」며 스스로 물러난적도 있습니다.』
조합원 3백60여명을 거느리는 이 회사 노조는 위원장인 허씨 1명만 전임으로 하는등 알뜰살림을 꾸리며 생산성 향상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더 성숙되어야 합니다. 노조는 요구를 하더라도 음식점 차림표처럼 이것저것 한꺼번에 해서는 안되고 가장 시급한 것부터 하나씩 해야 합니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 하지 않습니까. 또 쟁의를 하더라도 가급적 일은 하면서 하고 파업과 같은 극한 방법은 자제해야 합니다. 쥐 잡으려다 장독을 깨서는 안되니까요. 사용주도 울어야만 젖을 주던 구태에서 빨리 벗어나 먼저 주어 울리지 않도록 현명해져야 합니다.』
10년 「무사고」 노조위원장이 임금협상기를 맞은 노사양측에 주는 충고다.<김동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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