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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무역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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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 과학자가 철강을 매우 싸게 만드는 비법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철광석과 노동력이 필요 없고 밀가루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후 값싼 철강이 시중에 쏟아져 나왔다. 철강이 들어가는 자동차 같은 제품값이 싸져 국민 생활수준은 몰라보게 윤택해졌다. (중략…) 수년 뒤 밀가루 생산방법에 의문을 품은 한 민완 기자가 공장 잠입 취재에 나섰다. 생산라인은 없고 밀가루 포대만 잔뜩 쌓여 있었다. 밀가루를 남몰래 수출해 번 돈으로 값싼 철강을 수입해다 판 것이었다. 이 사건이 특종 보도되자 그는 사기 혐의로 구속되고 공장은 폐쇄됐다. 철강 시세는 다시 오르고 국민 생활수준도 예전으로 되돌아갔다.' 미국의 경제학자 맨큐의 '경제학 원론'에 등장하는 '교역'의 우화다.

이 과학자는 '발명'을 사칭한 사기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자유무역의 원리를 '발견'해 사업보국(事業報國)한 셈이 됐다. 근대 경제학의 250년 사상사는 숱한 천재들의 논쟁으로 점철됐다. 한 가지 이론을 놓고도 백가쟁명했다. 하지만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에 입각한 자유무역주의를 정면으로 반박한 학자는 거의 없었다.

미국은 자유무역 실험의 대표적 성공사례로 꼽힌다. 최대의 경제 강국이 된 건 연방 50개 주끼리 무제한 교역하도록 보장한 덕분이다. 주마다 제품과 서비스를 특화해 유무상통(有無相通) 함으로써 나라 전체가 혜택을 봤다. 하지만 자유무역이 성공의 보증수표는 아니다. 일찍이 '유아(幼兒)산업 보호 육성론'을 외친 리스트나 해밀턴은 신속한 산업 구조조정과 약자 배려 없이는 자유무역에 대한 기대는 신기루일 뿐이라고 설파했다.

앞서 맨큐 교과서 인용문 가운데 (중략…) 부분을 되살려 보면. ' (값싼 철강 때문에) 문 닫은 경쟁사들은 근로자들을 내보내야 했다. 이들은 다른 업종으로 금세 이직할 수 있었다. 실직은 진보를 위해 불가피한 일이라고 국민은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는 교과서일 뿐 현실 세계에선 어림도 없다. 진보를 위해 해고를 감수할 근로자가 어디 있겠으며, 실직자가 새 일자리 얻기는 또 얼마나 힘든가.

'개방이 꼭 번영을 가져다주진 않지만 개방 없이 번영을 이룬 나라는 없었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적은 참으로 옳다. 다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성사된 지금 이 말의 앞뒤를 바꿔 생각해 보고도 싶다. 개방 없이 번영을 이룰 수 없지만 개방이 반드시 번영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라고. 요는 이제부터다.

홍승일 경제부문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