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의 가르침 어찌 잊으리요|운경 이재형 선생 영전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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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이 얼마나 놀라운, 그리고 슬픈 전갈입니까.
30일 오전7시40분 운경 이재형 선생께서 영면하셨다는 소식이 나를 망연자실케 하였습니다.
재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전날인 29일 오후 선생의 병실을 찾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가시다니…. 승강기까지 뒤따라온 맏 아드님께『작년 상배 하신 후 심약해지시는 것 같다』고 말했더니 요사이 세상에서 드물게 보는 효자로 소문난 그 아드님께서『저희들이 모시느라고 하지만 아무라도 어머님께는 못 미치는 것 같아요』하고 수심 어린 한탄을 하였습니다.
운경 선생님. 저보다는 10수년의 위인데도 불구하고 때로는 동생같이, 때로는 친구같이 거의 매 주말이면 만나자고 하시어 세상사를 담론하고 바둑과 때로는 마작으로 같이 즐기자고
하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께서는 촌철·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은 예리한 경구로서 세상을 평론하고 조국의 장래를 걱정도 하셨습니다.
선생께서 광복된 조국의 제헌의원으로서 건국의 기초를 닦는데 그 풍만하신 치국경세의 경륜을 펼치신 것은 모두가 압니다.
60년대 이후 우리나라 야당을 주도하시어 민주·민권의 선봉적 큰 역할을 감당하신 것도, 집권당 대표로서, 국회의장으로서 국가 치정의 중추에서 조국에 공헌하신 것도 국민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운경 선생께서는 우리 헌정의 증인이었으며 주역이었습니다.
대나무와 같이 곧고 매서운 정도로 강직한 선생의 신념이 광복 후 조국역사의 마디마디마다 스며 있음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거울로 삼고 있습니다.
운경 선생님. 선생께서는 이 왕실후예로서 오랫동안 왕실제례를 주관하시었을 뿐 아니라 엄한 가율로 한국 전통가정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언제나 사직 동 선생님 댁에는 효도하고 우애로운 많은 가족들의 화기가 가득했습니다.
가위 대가의 대도를 보여주셨고 예의범절의 수범을 내렸습니다.
운경 선생님. 선생님 뒤에는 선생을 기리는 후학들이 많습니다. 선생의 높은 뜻을 새겨서 나라 일에 더욱 분려할 것입니다.
선생님의 뒤에는 효우 가득한 유족들이 통곡하고 있습니다. 견지를 길이 받들 것입니다.
고이 잠드소서.
1992년 1월30일.
채문식<민자의원·전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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