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두우시시각각

끝나지 않는 음모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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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음모론에는 명확한 증거는 없고 주장만 있다. 음모론을 펴는 자들은 진실 여부에 상관없이 음모론을 어떻게 그럴 듯하게 포장하느냐 하는 것에만 몰두한다. 그래서 "이건 음모"라는 주장 자체가 속임수이거나 음모일 경우가 많다. 음모론이 먹히면 좋고, 안 먹혀도 손해 볼 게 없다는 게 이들의 계산법이다. 음모론의 진실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국민의 몫이지만, 불행히도 국민은 늘 올바른 판단을 하지는 않는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음모론을 이용해 절체절명의 위기를 탈출했다. 그는 1990년 3당 합당 시 노태우 대통령, 김종필 공화당 총재와 함께 '내각제 합의각서'에 서명했다. 국가의 통치 구조를 바꾸는 중대한 사안을 정치지도자 몇 사람이 마음대로 약속하고 이를 국민에게 숨겼다는 건 심각한 문제였다. 그런데 몇 달 뒤 이 각서가 보도되자 YS는 "(노태우 대통령이) 나를 매장시키려고 각서를 언론에 흘렸다"고 자신을 희생자로 포장했다. 실제로 이 각서는 언론이 집요한 추적 끝에 빼낸 것이었지만, 여론은 YS의 손을 들어주었다. 밀실에서 내각제 각서를 작성했다는 문제의 본질은 묻혀버렸다.

이용훈 대법원장도 음모론으로 꽤 재미를 본 경우다. 변호사 시절 외환은행의 소송 대리인을 맡은 과정과 수임료 등이 상세히 공개되자 "대법원장을 흔들려는 세력이 있다"며 '검찰 음모론'을 폈고, 이 사건은 유야무야됐다. 이필상 전 고려대 총장은 실패한 경우다. 그는 논문 표절 의혹으로 궁지에 몰리자 "총장 취임 전 일부 교수가 찾아와 사퇴하라고 협박했다"며 음모론을 제기했지만 '사태의 본질은 표절'이란 여론에 밀려 총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래도 "이 사태의 배경에 교수사회의 알력이 숨어 있구나"라는 의혹을 제기하는 최소한의 성과는 거두었다. 이처럼 '실패한 음모론'조차 효과가 있기에 정치인에게 음모론은 유혹적이다.

최근 가장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준 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음모론'이다. 제2, 제3의 음모론으로 자기복제를 하면서 1년 이상 버티고 있다. 첫 번째는 "노무현 대통령이 FTA를 체결할 생각은 없으면서 보수세력을 고립시키는 정치적 카드로 활용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다음에 나온 건 "노 대통령이 '미국의 욕심 탓에 실패했다'며 결렬을 선언해 반미감정을 극대화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최근의 음모론은 진보와 좌파, 노동자와 농민, 심지어 방송사까지 FTA 체결에 반대하는 현 상황과 맞닿아 있다. 이들이 결집해 국회 비준 반대에 나설 게 뻔하고, 이를 자연스레 대선과 연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거의 소설 수준의 상상력이다. 노 대통령은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FTA에 반대하는 좌파 지식인이나 정치인들을 준엄하게 비판했다. 가뜩이나 낮은 지지율 속에서 자신의 지지층마저 격렬히 반대하는 FTA를 밀어붙였다. 어떤 정치인도 자신의 지지세력을 위해 본인을 희생할 만큼 거룩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FTA 음모론을 퍼뜨린 사람들은 노 대통령에게 사과해야 마땅하다. 그렇지만 FTA 음모론은 올 연말 대선이 끝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대선에서 표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한나라당이 국회 비준에 총대를 메지 않기 위해선 음모론만큼 좋은 핑곗거리가 없기에. 범여권의 대선 주자들은 기존 지지층 재결집에 'FTA 반대'만 한 호재가 없기에. 노 대통령의 국정 운영 스타일로 볼 때 비준안을 툭 던져 놓고 '국회가 처리하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는 식으로 방치할 가능성이 커 보이기에.

매듭은 묶은 자가 풀어야 한다. 기왕 어려운 결심으로 밀어붙였다면 노 대통령이 국민과 국회의원 설득에 직접 나서서 국회 비준까지 성사시키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것이 음모론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

김두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