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중심」선택의 함정(유승삼 칼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어느쪽이 먼저인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 정당의 후보선출 과정은 대학입시와 꼭 닮았다. 출마희망자가 공천서류를 내고 사무직원이 이를 접수하는 모습은 대학입시때의 지원 및 접수광경과 똑같고 공천심사위원들이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채 반감금 상태가 되어 비밀스런 작업을 하는 것은 입시출제 작업과 아주 흡사하다.
후보공천 과정의 이런 밀실성 때문에 우리나라 선거는 관람용으로서는 스릴만점이다. 평소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신물이 나 하던 사람도 그 밀실성 때문에 그 결과를,마치 입시생이 없더라도 TV의 대학지원 상황을 흥미롭게 시청하는 것처럼 호기심을 갖고 기다리게 된다.
○밀실공천의 폐단
이런 정치행태가 바람직하냐 하는 문제는 별개로 의도한 것은 아니나마 정당들은 결과적으로는 국민의 관심을 관객적 차원에서나마 이끌어 올 수 있는 장치를 갖고있는 셈이다.
이제 며칠 뒤면 대입합격자 발표처럼 각정당의 공천결과가 발표될 것이다. 그러면 자연 국민의 시선은 어떤 인물이 나서는가에 쏠리게 되고 나름대로의 마음속 투표를 하게 될 것이다.
이는 개개인으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런 반응이라 하겠지만 여기에는 우리들이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 수 있는 정치적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정치적 이념이나 그에 바탕을 둔 정치적 구도가 인물들의 그림자에 가리워져 버릴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물론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출마자의 됨됨이가 어떠하느냐를 가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더구나 우리의 기성 정치권처럼 함량미달의 정치인들이 한둘이 아닌 현실을 경험한터라 만사 제쳐놓고 인물의 됨됨이부터 살피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이 인물중심의 선택에는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측면이 있다.
이상적인 정치발전이 정책적 차별성이 있는 정당들이 그 차별성을 경쟁하는 것이라면 아무래도 우리들은 관심의 눈길을 그가 속한 정당에 먼저 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 정치현실은 당내 민주주의도,사안에 따른 크로스보팅의 관행도 정착되어 있지 못하기에 더욱더 그렇다.
우수한 자질과 능력을 지니고 있더라도 그것이 발휘될 수 없게 되어있는 것이 정치현실이다. 널리 그 자질과 능력을 인정받는 인사들이 국회의원 생활을 경험하고 나서 한결같이 토로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이다. 천재도 바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정치의 현주소라는 것이다. 결국 권력의 성격,정당의 체질이 바뀌어지지 않고서는 아무리 인물을 바꿔도 변화가 올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정치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이런 정치현실을 유권자들이 투표만으로 바로잡아 놓을 수는 없겠으나 국민만이라도 우리의 정치구도가 정책정당의 대결로 바뀌도록 주어진 여건속에서나마 최선을 다할필요가 있다.
○역사·구조적 문제
정당에 관계없이 자질이나 능력을 중시하려는 인물중심의 선택경향이 합리적인 것 같지만 그것은 겉만 번드레한 경력을 갖춘 인물들에게만 유리한 선택이다.
그래서 그러한 선택은 유권자의 선한 의도와는 달리 유명인사들의 기득권을 강화해주고 기존 정치구도를 온존시켜 줄 뿐이다.
새해초에 발표된 한 여론조사 결과는 유권자들이 그러한 함정에 빠질 위험성이 큰 생각들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지지하는 정당소속의 후보라도 다른 후보가 개인적으로 더 낫다고 판단되면 그 후보에게 투표하겠다」는 응답이 전체의 78%로 나타났다.
이는 50%가 넘는 국민이 지지할 정당이 없고 60%의 국민이 새로운 정당의 출현을 갈망하고 있는 현상황에선 충분히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권자들이 이런 인물중심의 선택을 하면 할수록 우리 정당의 이념화는 그만큼 멀어지고 의욕적이고 개성있는 정치신인의 등장 또한 그만큼 어려워질 것이다. 이것은 유권자들의 진정한 의도에는 반하는 결과다.
그동안 우리 정당들은 민주대 반민주의 원론적인 대결구도 속에서 저마다 한껏 지지층을 넓히기 위해 너나없이 국민정당을 표방해 왔기 때문에 여야간에도 정책적 차별성이 크지않다. 게다가 제도적으로도 정당투표제와 같이 정당의 정책대결을 유도하는 제도를 도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책개발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도 못하고 있다. 국민들 역시 그러한 정치구조 속에 오래 젖어 각정당의 정책들을 눈여겨 보지않는 경향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민주화의 실현이나 정치발전의 관점에서 볼때 어떤 정당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이 결코 의미없지는 않다. 정당세력 판도의 변화만으로도 그 정치적 파장은 클 수밖에 없다. 또 최근에는 정책적 차별성을 내세우는 신당들도 출현하고 있어 우리정치도 앞으로는 정책대결로 화학변화할 조짐을 보여주고 있다.
○아쉬운 정책정당
정당우선의 선택을 통해 이런 조짐들을 키워주어야 한다. 경제대국 일본의 정치적 후진성이 좋은 타산지석이다. 정치에의 기대저하로 인해 국민들의 탈정당 현상이 장기화 하자 일본 정치는 그 민주적·대의적 기능을 상실한채 관객정치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투표율이나 선거결과도 선거가 시시하면 기권하고 흥미를 자극하면 투표에 나서는 이른바 무당파층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이는 기득권층,기성정치인들에게는 오히려 좋은 현상이겠으나 정치발전이나 변화를 바라는 층에게는 절망적인 것이다.
지난해 지방의회 선거는 우리에게도 일본과 같은 현상을 빚어낼 수 있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정치에 대한 불신과 냉소주의는 일본에서와 같은 부정적 현상을 낳을수도 있지만 방향을 잘잡으면 변화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현재 우리들은 그 갈림길에 서있다. 인물중심의 선택이 가져올 함정을 경계해야 할 한가지 이유도 여기에 있다.<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