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점령은 불법" 친미국가 사우디 돌연 미국 때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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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중동의 전통적인 친미국가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 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흐르고 있다. 사우디의 압둘라 국왕이 28일 이라크 사태를 "외국의 불법적인 점령"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즉시 사우디 정부에 해명을 요청했다. 최근 중동분쟁의 새로운 해결사로 등장한 사우디와 미국 간 피할 수 없는 '기싸움'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압둘라 국왕은 이날 22개국 아랍 지도자들이 모인 아랍연맹(AL) 회원국 연례회의 기조연설에서 "외국의 불법적인 점령하에 이라크에서는 형제 간에 유혈사태와 추악한 종파주의가 발생해 내전으로 치닫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라크의 미래가 외국의 힘에 의해 결정되지 않도록 아랍국가들이 나서야 한다"며 아랍권의 결속도 촉구했다. 동맹 성격의 우방인 사우디 지도자들이 더러 미국의 이라크 정책을 비판하긴 했지만 불법이라고 규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 정부는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니컬러스 번스 국무차관은 29일 압둘라 국왕의 발언에 "다소 놀랐다"면서 "분명히 사우디 정부에 해명을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미국 주도 다국적군의 이라크 전쟁과 점령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우디가 이라크 사태를 비난한 것은 수니파 종주국의 체면 때문이다. 시아파 정권이 들어선 이라크에서 수니파에 대한 억압이 있다는 비난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압둘라 국왕의 체면 세우기는 최근 사우디의 행보와도 관련이 있다. 오일 달러를 활용해 기존의 이집트를 대신할 중동 평화중재자로서 부상하려는 모습이다. 지난달 하마스 정부와 파타당 지도부를 사우디로 불러 협상을 성공시켰다. 급부상하는 시아파 종주국 이란의 지도자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을 리야드로 불러 최근 고조되는 중동 내 시아-수니파 갈등을 진정시키려는 노력도 펼쳤다. 레바논과 이라크의 종파 간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자는 데 양측은 합의했다.

미국은 사우디의 이 같은 '평화중재'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으로 관측된다. 미국은 중동에서 '사태 해결사'보다는 '협력자'를 원하기 때문이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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