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에 뺏긴 일왕 허수아비(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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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빨리 내놓으란 말이오.』
『글쎄,드릴 수 없습니다.』
15일 오후 2시20분쯤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앞.
옷속으로 파고드는 냉기에도 아랑곳 않고 일본의 사죄와 배상요구시위를 벌이던 항일단체 회원들이 대사관을 경비하던 경찰들과 심한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회원들로 이날 화형식을 가지려했던 일왕의 허수아비를 경찰이 빼앗아가버리자 이에 항의한 것.
『노인네들이 무슨 힘이 있다고 청년 10여명이 달려들어 강제로 빼앗아갑니까. 더구나 화형식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유족회 김종대 회장(56)은 분을 삭이지 못한 채 『다들 얼어죽더라도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며 격앙된 소리로 외쳤다.
이보다 앞선 오후 1시에는 순국선열유족회·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태평양유족회등 3백여명이 잇따라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피킷시위를 벌였다.
특히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회원들은 희생자 추모비 설립등의 요구사항이 적힌 베옷을 입고나와 눈길을 끌었다.
협의회 조혜란 간사(32·여)는 『어린 나이에 끌려가 머나먼 이국땅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넋을 기리는 뜻에서 베옷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도로를 차단한채 대사관을 경비하던 경찰주위를 맴돌며 구호를 외치던 회원들은 곧이어 미리 준비한 계란 1백50여개를 대사관을 향해 던지며 분풀이를 했다.
계란이 대사관벽과 창문을 맞출 때마다 환성과 박수,요란한 구호소리가 대사관 주변을 가득 메웠다.
『태평양전쟁이 끝난지 50년이 다 돼가도 일본은 아직도 자신들이 지은 죄를 모르고 있어. 젊은 사람들이 그걸 똑똑히 알아야 돼.』
5일전 전남 장흥에서 상경했다는 갓과 도포차림의 김현채 할아버지(76)는 추운날씨에 코끝이 빨개졌어도 쉰 목소리로 계속해서 구호를 따라 외치고 있었다.<정형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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