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악몽에서 벗어나려면(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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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일본 총리의 방한시점을 계기로 정신대에 관한 결정적 기록과 증언이 쏟아지고 있다. 특히 12세 국교생의 정신대 징발에 관한 당시 일인교사와 생존자의 생생한 증언은 듣는 이로 하여금 분노와 적개심마저 끓어오르게 한다.
일제의 악몽이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와서 다시금 새로운 고통으로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억압과 신고로 가득찼던 반세기전의 민족적 수모와 아픔이 아직도 악몽으로 남아 우리에게 되살아나고 있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가 지금 던져야할 질문은 가해자인 일본이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인 우리 스스로라고 생각한다.
지난날의 수모와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우리 스스로가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에 먼저 자성의 질문이 던져져야 할 것이다. 식민지 시대의 아픈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성적 자세보다는 감정적 울분 토로에만 그쳤던 것이 아닌가를 되돌아 보는 것이다.
정신대의 존재를 모두가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규모나 징집방식 또는 그들의 참상에 대해 구체적 자료를 찾는 노력과 작업을 정부도 벌이려 하지 않았고 지속적인 연구나 탐색을 벌이는 조직적 단체도 없었다는 사실이 새삼 부끄러운 일로 우리에게 남는다.
물론 뜻있는 일부인사와 단체가 최근 새로운 문제점으로 이 부분에 관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정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언론 또한 굳이 과거의 치부를 들추는 일에 기꺼이 동참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서울시 교육청은 정신대기록이 있는 학적부를 공개하지 말라는 지침까지 내렸다고 한다.
정신대뿐만 아니라 일제의 징용희생자에 관한 자료마저도 일본인의 노력에 의해 조사되고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부끄럽게 한다. 악몽에서 벗어나는 길은 원인의 제거,과거의 청산에 있다. 그것은 주먹쥐고 치를 떠는 감정적 청산이 아니라 과거의 기록을 하나씩 찾아 정리해서 요구할 것은 요구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이성적 청산이어야 했다.
감정으로는 반일,극일을 외치면서 광복 반세기에 다시금 일본의 경제적 예속에 들어가 있는 오늘의 우리 경제·사회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일본문화를 보면서 일제의 악몽이 언제 다시 현실로 재현될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정신대 문제를 계기로 우리가 감정적 대처가 아닌 이성적 과거청산을 위해서 반드시 해야할 일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식민지 시대의 진상조사가 정부의 국사편찬위와 같은 기구와 민간단체의 합동연구로 지속적으로 추진되기를 기대한다.
이번엔 정신대지만 다음에는 또 어떤 일제의 악몽이 되살아날지 모른다. 그때가서야 또 주먹쥐고 치를 떨다가 잊어버리는 감정적 대응을 되풀이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돌출되는 과거청산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이성적 과거청산이어야만 과거의 악몽을 벗는 진정한 과거청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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