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의즐거운천자문] 음수사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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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눈 밝은 독자를 만난 신문은 지혜의 샘(NIE)이 되고 무정한 독자를 만난 신문은 곧장 신문지로 전락한다. 로댕을 만난 돌덩이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지만 무지한 등산객을 만난 바위는 낙서장이 된다. 누구를 만나느냐. 이것이 운명 교향곡의 영원한 주제다.

사랑은 키우는 것이다. 자립심을 키워준 어머니를 만난 장애소년이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는 소식은 봄꽃의 미소보다 그윽하고 향기롭다. 다시 보고 싶은 휴먼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을 뉴스에서 만난 기쁨이라니.

그날은 1999년 4월 18일 일요일이었다. 제목 '오토 다케의 즐거운 인생'. 시청 소감엔 이렇게 씌어 있다. "이젠 천사의 얼굴을 그릴 수 있겠구나."

첫 대면은 충격적이었다. 마치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마술쇼에서나 봄 직한 장면. 얼굴과 가슴은 있는데 휠체어 밑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경악이 경이로 바뀌는 데는 불과 1분이 소요되었을 뿐. 그 청년의 얼굴이 너무도 해맑고 환했기 때문이다. 소리는 비슷한데 뜻은 천지 차이인 게 '환한' 얼굴과 '화난' 얼굴이다. 사지가 멀쩡한데도 오만 인상을 찌푸리며 걷는 사람이 거리엔 얼마나 많은가.

소년의 뒤, 아니 곁엔 두 명의 천사가 또 있었다. 어머니는 그를 시종일관 유니크한 존재라고 명하며 기를 살려주셨다. 오토 다케가 자신을 '초개성적 외모'라고 뽐내는(!) 건 순전히 어머니의 가르침 덕이다.

자원하여 4년 동안이나 담임을 맡은 다카기 선생님은 그를 특별한 존재로 대우하지 않았다. 계획적이라는 말의 어감이 나쁜 건 세상에 나쁜 계획이 많이 떠돌기 때문일 텐데, 선생님의 계획은 아름답고 원대했고 성공했다.

여기 한 명의 천사를 추가한다면 이번에 오토 다케가 당당히 교단에 서도록 배려한 교장 선생님이다. 그는 감동을 창출할 줄 아는 교육예술가다. '같이' 사는 세상이 '가치' 있는 세상이란 걸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아침에 미역국을 먹으며 이 미역을 따러 차가운 바다에 들어간 해녀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가끔은 잊어버린, 그래서 잃어버린 감사를 찾아오자.

청소년 권장도서를 물으면 나는 오토 다케의 수기 '오체불만족'을 추천한다. 그 책을 읽고 나면 불만이 사라지고 감사가 찾아온다. 그는 오래전부터 '장벽 없애기(barrier free)' 운동을 펼치고 있다. 스스로 가지고 태어난 행복마저 눈치채지 못하고 마음의 벽을 두껍게 쌓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는 살아 있는 희망의 증거다.

내가 꿈을 이루면 나는 다시 누군가의 꿈이 된다. 오토 다케는 제2의 다카기 선생님이 되었고, 이젠 세상의 많은 오토 다케가 누군가의 꿈이 될 날을 바라보며 힘차게 행진할 것이다. 밥줄.돈줄에 얽매여 사는 '화난' 우리에게 그는 '환한' 힘줄이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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