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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거꾸로 공법으로 세계 기록 세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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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1972년 3월 23일. 울산 미포만 백사장에서 거행된 울산 현대조선소(현 현대중공업)의 기공식은 한마디로 대한민국 중공업의 기공식이었다. 박 대통령은 조선 산업에 거는 기대도 남달랐겠지만 이른바 4대 핵공장 건설이 시사하는 경제적 의미를 눈으로 직접 보여주고 싶었던지 국무위원들은 물론 서울에 상주하고 있는 각국 대사들까지 기공식 현장으로 초대했다.

울산이 생긴 이래 가장 큰 행사였다. 5000여 명이 행사장에 집결하자 식당 하나 변변하게 없던 울산에 ‘좌판식당’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저녁이 되자 밤늦도록 카바이드 가스불이 불야성을 이루었다. 행사장 입구에 내건 ‘50만t급 초대형 울산현대조선소 기공식’ 간판에 붙었던 수백 개의 풍선들도 막걸리에 취한 듯 멋대로 흔들리며 흥을 돋우었다.

연설 원고에도 없는 즉흥 연설을 할 정도로 박 대통령 기분이 좋았다면 조선소를 건설할 현장이 마음에 드셨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주 흡족해 하셨지요. 기공식이 끝나고 그 많은 내빈이 단상에서 기다리고 있는데도 현장을 떠나시지 않는 거야, 하하항. 그러면서 일일이 손으로 가리키며 저기가 도크를 팔 위치냐, 저기 수심은 얼마나 된다고 그래? 이러면서 관심을 보이시는데, 내가 물속에 들어가 봤어야지? 그냥 충분합니다, 아주 좋습니다, 이러는 거지요, 하하항.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암행까지 시키셨더라구.”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도 몰랐지. 대통령께서 내려오셨을 때 인사를 드리니까 ‘수고가 많았다면서’ 이러시거든? 그 말씀이 나중에 알고 보니 암행을 시켰다는 암시였어. 원래 울산에 공업도시를 세우자고 건의했던 사람이…앞머리가 좀 훤하게 넓은 그 사람, (기억이 가물한 듯) 아이구…그 왜 있잖아요, 대통령이 두목이라고 불렀던 사람, 몰라? 대통령이 약주만 드시면 허벅지 자꾸 찌르면서 좋은 거 불러오라고 해서 멍이 시퍼렇게 들었다고 했던 사람, 하하항. 입에서 뱅뱅 도는데, 나중에 장관까지 했지만 대전 사람. (김용태 장관이라고 하자) 그래! 그때는 국회의원 했는데 그 사람을 내려 보내가지고 샅샅이 보고를 받으신 거야. 공사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전부 알아보라고 말이야. 그래가지고 김 장관은 민심탐방까지 했다는 거예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철거시키지 못하고 그냥 돌아오는 놈들, 하루 2만 평 이상 밀지 못한 놈들, 막 조지고 그랬거든? 그것까지 다 알고 계시는 거야. 하하항. 그래도 뭐 수고했다는 거 보니까 좋게 보고를 받으신 모양이지?”

대통령에 혼쭐 난 태완선 부총리

원고에도 없는 연설을 할 때는 어떤 내용을 강조하셨습니까?
“그때 김학렬씨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건설부 장관을 하던 태완선씨, 경상도 사람인데 그 사람이 부총리로서 따라왔어요. 김학렬씨가 아주 머리도 좋았지만 열정을 가지고 마음 고생을 무척 하셨는데 참 마음이 아프고 안 됐어. 부총리 석에 앉아서 진심으로 축하해줄 양반인데 말이지. 근데 재미있는 건 태완선 부총리가 대통령이 원고에도 없는 말씀을 하시니까 처음에는 가만 있더니 연설문을 자꾸 앞으로 넘겼다가 뒤로 넘겼다가 찾느라고, 하하항. 말씀의 요지는 그거야, 참 꾸밈이 없고 현실적인 얘기예요. 모든 주민들하고 어민들한테 협조하라고, 여러분 자제들은 바다에 나가 어렵게 고기를 잡다가 풍랑을 만나 불행도 겪고 하는데, 앞으로는 조선소에서 일하게 될 것이고, 고기 잡는 것보다 몇 배의 월급봉투를 집으로 가져가게 될 거라고, 그러면 바다에 잃어버리고 눈물을 보이는 가정도 없어질 것이고, 학교를 보내지 못하고 있는 자제들은 조선소로 보내 기술도 배울 수 있고, 공부시킨 자제들은 출세도 할 수 있다고, 울산에 일자리가 많다는 소문이 나게 되면 지방에서 몰려드는 인구도 늘어나고 그러면 장사하는 사람들도 얼굴이 펴질 게 아니냐, 모든 것이 다 좋은 일을 맞을 수 있으니까 현지 주민이나 모든 어민이 협조를 해주시오, 그런 말씀을 해요. 그만큼 조선소 건설에 기대와 집착이 크셨던 거지만 전부 현실적인 말씀 아니에요?”

그 당시 태완선 부총리가 조선소 건설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해서 논란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게 그날이야. 그것도 나중에 알았는데, 대통령이 화를 내셨다고 해서 대체 무슨 일인가 했더니 부총리 때문에 그랬다는 거지요. 무슨 얘기냐 하면 우리가 바닷가 황무지에 천막 하나 쳐놓고 기공식을 했었으니까 거기는 대통령께서 식사할 데가 없어요. 그렇다고 식사를 따로 주문하는 것도 대통령께서는 그러지 말라 하고. 미리 비서실에 의견을 구하니까 절대 준비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렇게 되니깐 대통령께서 기공식 끝내고 대구로 올라가서 국회의원 몇몇 하고 수행한 장관들, 대사들, 관구사령관들, 그렇게 여럿이 저녁을 하셨어요. 그때 대구 관구사령관이 채명신 장군이었을 거예요. 문제는 거기서 있었던 거야. 나는 현장에 있어야 되니까 수행을 못 하고 나중에 얘기만 들은 건데, 그때가 저녁이니까 식사를 끝내고 술을 한잔씩 할 거 아니에요?”

▶1972년 현대 미포조선소에서 배를 조립하고 있다.

“도크야 큰 수영장 하나 파는 것”

부총리 발언은 은연 중에라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건 사실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깐 본의 아니게 일을 어렵게 만든다고 하신 거예요. 부총리도 그렇지, 부총리 된 지 얼마 안 됐다 해도 그 어른이 조선소 때문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는 알 거 아니에요. 4대 핵공장이라고까지 했는데 말이야. 그러니 그런 것만 봐도 박 대통령이 아니면 조선소가 될 수 없었지요. 이런 얘기는 나중에 채 장군이 내 방에 일부러 찾아와서 해준 거예요. 대통령의 집념이 대단하시더라, 부총리가 한마디 했다가 대통령한테 호통을 당했다고. 하하항. 호통을 당해도 싸지, 조선소 건설이 어디 개인적인 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까? 더구나 기공식 현장인데도 대통령이 직접 내려오셨는데.”

영국에 가셨을 때도 조선소 도크를 목욕탕 욕조 만들 줄 알면 만들 수 있다고 하셨는데….
“(말을 중단시키며) 아니, 그건 말이지, 일테면 이런 거예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쪽으로 발상을 해야 한다는 뜻이야. 도크가 절대 간단치 않아요. 그거 만들면서 희생자까지 생겼어. 태어나서 구경도 못한 사람이 태반인데 어떻게 간단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뭐든지 일을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지. 지금이야 조선소가 세계적인 규모고 수주량도 세계에서 1, 2위를 다투니까 조선소를 만든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몰라요. 요즘 근로자들이나 일반 사람들한테 그런 얘기 해봤자 모른다구. 원래부터 있던 거 아니냐고 하는 판국에 이해를 하겠어요? 그런데 그때는 뭐든지 어려울 때고 규모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막연하게나마 엄청나다는 건 아니까 겁부터 먹고 있단 말예요. 그러니 나까지 어렵게 생각해서 되겠어요? 그래서 도크야 뭐 큰 수영장 하나 파는 거라고 했던 거지. 하하항.”

정 회장도 신이 나면 시차를 초월해 얘기할 경우가 있다. 회고 중에 ‘우리가 원자력발전소를 세울 때 배보다 몇 배 두꺼운 강판을 용접하고 모든 것을 새지 않도록 용접했는데 배는 거기에다 대면 아무것도 아니다’는 말도 했다. 현대조선소가 도크를 완공하고 1호 선박을 진수시킨 것이 1974년 6월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원자력 발전 시대의 문을 열었던 고리원자력발전소 1호기 상업운전이 78년 4월이니까 그 전에 본공사에 참여했다고 해도 시점상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 회장이 보여주는 발상의 전환인 것이다.

그는 불모지에서 거대한 조선 왕국 건설을 실현시킨 힘이 어디에서 나왔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것이 국민에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였다.

자금 문제를 어렵게 해결했습니다만 리바노스의 배를 공기 안에 건조할 수 있을지 우려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지 않습니까?
“우리 조선소는 도크를 만드는 것도 그렇고 배를 짓는 것도 그렇고 모두 세계 기록을 세웠어요. 자료 찾아보세요, 세계 조선사에 남아 있는 기록이에요. 72년 3월에 맨땅에다가 빔을 박기 시작해서 74년 6월에 첫배를 진수시켰으니 말이야. 그것도 26만 t이나 되는 거대한 배를 말이지. 2년 만에 도크 만들고 건조까지 한다는 건 상상을 못하는 일이지요. 그럼 그걸 어떻게 해냈느냐, 그것도 생각을 바꾸는 거예요. 한마디로 말하면 배를 거꾸로 만드는 거야. 도크도 없지, 철판 자르는 공장도 없지, 그렇다고 도크를 완공할 때까지 기다리면 세월 다 가는데 언제 배를 만들어? 원래는 도크부터 만들고 선수(船首)와 선미(船尾)를 설계대로 조립해나가는데 그게 돼? 그러니깐 배 엉덩이부터 들이밀어가지고 도크가 만들어지는 진도를 맞춰서 선수를 조립하고, 배 몸체를 들여놓고 그런 식으로 해나간 거예요. 마구 밀어붙이는 식이지만 기다려서도 안 되고 더 나가서도 안 되니까 아주 치밀하게 진도를 맞추는 거고 도크를 만들면서 배를 짓기 땜에 절대로 치밀하지 않으면 죽어! 그런 식으로 거꾸로 배를 지었기 때문에 세계 신기록을 세운 거야, 하하항.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절대 리바노스의 배를 제 공기에 맞출 수가 없었어요.”

그 당시에도 그런 공법이 있었습니까?
“있긴 뭘 있어, 다른 조선소에서는 상상도 못한 거지. 그러니깐 한번은 가와사키하고 미쓰비시에서 현대가 조선소를 만든다고 하니 격려를 해준다고 왔어요. 겉은 격려고 속은 도대체 어떻게 만드는지 구경이나 하겠다는 심보로 온 거야. 그 친구들은 아직 도크도 완공이 안 됐으니까 건조를 한다는 건 상상도 못한 거지. 근데 현장을 보더니 눈이 왕방울만해져서 자꾸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거예요. 갑자기 땅이 꺼졌나 근처에 다른 조선소가 있었나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는 거지, 하하항. 도크는 도크대로 파고 있고 한쪽에선 엉덩이부터 밀어 넣고 막 용접을 하고 있거든? 이게 뭐냐 이거야. 뭐긴 뭐야, 정주영 건조법이다 그랬지. 하하항.”

그렇게까지 하자면 조선 기술이 있어야 했을 텐데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우리나라에 조선 기술자가 있기나 했나? 우린 더구나 건설회사에서 출발했잖아요. 김영주 회장(정 회장의 매제·당시 상무)이 여기 있는 친구 저리 빼고 저기 있는 친구 이리 빼내고 하면서 배를 구경만 했어도 다 끌어다가 훈련시키고 부려대느라고 완전히 십장 노릇 했지만 그것 가지고 돼요? 어림도 없지. 정말 막막하고 힘들었어요. 그때 영이(김영주 회장을 영이라고 불렀다)가 반쯤 죽었을 거야, 하하항.”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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