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마을] 가짜 고학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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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이가 와서 구두를 내밀었다. 그러곤 하는 말이, 자신은 가짜 고학생인데 잘만 하면 벌이가 짭짤하다는 것이었다. 귀가 솔깃해진 나는 얼추 한 달간 벌어 모은 돈으로 중학생 교복과 교모를 사 가짜 고학생 행세에 나섰다.

우선 빳빳한 도화지를 네모 반듯하게 잘라 '저는 불우한 고학생입니다. 도와주시면 더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하는 사기성 호소문을 적었다. 껌과 볼펜을 산 다음 충남 북부 지역으로 가는 시외버스에 올라 승객들에게 호소문을 나눠주었다.

효과는 단박에 나타났다. 어떤 승객은 껌과 볼펜은 받지도 않고 당시로선 거금인 1000원을 손에 쥐여주기도 했다. 구두를 닦을 때보다 서너 배는 많은 '수입'에 감탄한 나는 그 짓을 몇 달이나 더 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 했던가, 시외버스에서 나를 유심히 살피던 어른 한 분이 예산터미널에서 내 뒤를 바짝 따라붙더니 어느 누옥으로 밀어붙였다.

"난 ○○학교 선생인데, 너 가짜 고학생이지? 피치 못할 곡절이 있어 이 짓거리를 하는 거겠지만 사람은 양심을 속이면 못쓴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라!" 그러고는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면 경찰서로 끌고 가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사시나무 떨 듯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하니 본분과 양심까지 판 나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자괴감에 그만 혀를 물고 죽고만 싶었다. 집에 온 즉시 교복을 불살라 버리고 다시 구두닦이 일을 시작했다.

이전에 졸업식장에 가면 자신이 입었던 교복을 발기발기 찢는 학생이 꼭 한 둘씩 있었다.

그들에게 난 말하고 싶었다. 제발 교복을 찢지 말라. 내게 교복은 너무도 입고 싶었던 눈물과 한 그 자체였다. 성의(聖衣)에 가까운.

홍경석(48.대전시 용두동.회사원)

4월 6일자 주제는 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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