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지원 기대말고 제대로 좀 만들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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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20일 미주리주 클레이코모의 포드 자동차 공장을 방문했다. 부시 대통령이 막 조립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인 이스케이프를 타고 공장 근로자와 대화하고 있다. [클레이코모 로이터=연합뉴스]

"도요타의 렉서스를 살 만한 돈이 생겼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세금 정산으로 수만 달러를 돌려받게 된 가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도 고급 차가 많은데 굳이 일본 차를 예로 든 것이다. 이 발언으로 제너럴 모터스(GM).포드.크라이슬러 등 '빅3'는 적잖이 기분이 상했다.

그런 부시 대통령이 20일 취임(2001년) 후 처음으로 자국 자동차 공장을 방문했다. 캔자스시티(미주리주) 인근의 GM 페어팩스 공장과 포드자동차의 클레이코모 공장이었다. 그는 일본 닛산과 독일 BMW의 미국 내 공장을 둘러본 적은 있지만 미국 자동차 공장은 처음 찾았다. 더 열심히 하라고 격려 겸 채근하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 위기의 미국 자동차=미국의 빅3는 지난해 무려 160억 달러의 적자를 냈다. 잦은 고장으로 인해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받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차들은 여러 가지 혜택을 내걸고 있지만 판매 신장세는 미미하다. 반면 도요타.혼다.닛산 등 일본의 3대 자동차회사들은 미국에서 질주하고 있다. 특히 도요타는 이르면 2년 내 현재 세계 최대인 GM을 제치고 정상에 등극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빅3는 요즘 대규모 감원을 포함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부시 대통령이 방문하자 업계에서는 혹시 무슨 선물이라도 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빗나갔다. 부시는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제대로 좀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하이브리드 차는 저속에서는 전기를 사용하고, 정상 운행 때는 휘발유를 사용하는 에너지 절약형 차다. 빅3가 이런 에너지 절감형 차를 제때 개발하지 못해 고유가 시대에 석유 소비를 줄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 담긴 말이었다. 그가 이날 방문한 두 공장은 최근에야 하이브리드 차를 생산하기 시작한 곳이다. 도요타가 1997년 하이브리드 차량인 '프리우스'를 양산한 것에 비하면 무려 10년이나 늦었다.

부시 대통령은 "하이브리드 차는 미국 안보와도 직결된다"고 강조했다. 중동산 석유 의존도를 줄일 경우 미국을 겨냥한 테러 위험이 그만큼 낮아진다는 논리였다. 옥수수 등 곡물에서 추출한 에탄올을 연료로 사용하는 차량 개발에도 힘써 줄 것을 당부했다. 여기엔 "미국 농민과 농업을 돕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붙였다.

◆ 어떤 지원도 언급 안 해=로이터통신은 이번 방문을 앞두고 "부시 대통령이 빅3와 화해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위기의 자동차 업계를 지원하겠다는 언급은 없었다. 빅3 경영진과 노조는 실망했다. 그래서 빅3 경영진은 다음주 워싱턴을 방문해 부시 대통령과의 면담을 다시 추진하기로 했다.

포드 클레이코모 공장의 짐 스타우퍼 노조위원장은 "미국 자동차산업이 어려워진 요인 중에는 부시 행정부가 엔화 약세를 막지 않은 것도 포함된다"며 "그런데도 대통령은 우리의 경쟁력만 문제 삼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미국 언론들은 부시 편에 섰다. 지금 상태로는 미국 자동차에서 희망을 찾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빅3가 근로자의 건강보험료 부담을 정부에 떠넘기려 하는 것에 대해서는 심각한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CNN은 "부시 대통령이 빅3에 채찍을 든 것은 적절한 행동이었다"고 전했다.

강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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