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미국보다 보유세 적다더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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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올랐다고 해야 우리의 보유세 부담은 미국 등 선진국의 절반도 안 되는데 무슨 소리냐."

보유세가 한꺼번에 너무 올랐다는 아우성이 나올 때마다 정부가 빼드는 전가의 보도다. 권오규 경제부총리는 "세금 낼 능력 없으면 집 팔고 이사 가면 된다"고 친절하게 '안내'까지 했다.

그러나 정부가 납세 모범으로 꼽는 미국의 실상은 정부 설명과는 영 딴판이다. 미국 버지니아 주에 사는 교포 제이슨씨가 e-메일로 자세히 소개한 미국의 보유세 관련 제도는 기자조차도 '정말일까'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대부분 주가 보유세를 매길 때 처음 구입 가격을 기준으로 삼는다. 집값이 뛴다고 보유세를 한꺼번에 두세 배씩 올리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주 정부에 내는 보유세는 연방정부가 전액 소득공제를 해준다. 모기지론(주택담보대출)도 최대 100만 달러(약 10억원)까지 대출금 이자를 소득공제 해준다. 캘리포니아 주를 비롯한 상당수 주에는 55세 이상 노령자의 보유세 부담을 덜어주는 제도가 있다. 왜 그럴까. 제이슨씨는 "미 정부가 중산층의 내 집 마련이 사회 안정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미국 사정은 우리와 다르다. 무엇보다 LA나 뉴욕 등 대도시를 빼고는 '부동산 불패 신화'가 없다. 미국인은 내 집에 대한 집착도 우리처럼 강하지 않다. 이러니 애당초 보유세 폭탄을 쓸 이유가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소득공제와 같은 알맹이는 쏙 빼고 고지서에 찍힌 세금만 가지고 "미국보다 보유세 부담이 적다"고 우기는 것은 문제가 있다. 선진국은 대략 연소득의 3.5%를 보유세로 낸다. 정부 말대로 2009년까지 보유세 실효세율을 1%로 끌어올리면 강남.분당 등 소위 '버블 세븐' 주민의 상당수는 연소득의 10% 이상을 보유세로 물어야 한다. 중산층조차 버블 세븐 지역을 감히 넘볼 수 없게 된다.

아들 교육 때문에 강남에 사는 이정수(46)씨는 "집값 오른 만큼 팔 때 양도소득세를 더 내지 않느냐"며 "중산층 소득으로도 감당 못할 보유세를 때리는 건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책이냐"고 반문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善意)로 포장돼 있다'는 영국 속담이 있다. 좋은 뜻으로 추진한 정책이 결과적으로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무턱대고 세금 방망이를 휘두르기 전에 이 정부가 다시 한번 떠올려야 할 경구다.

정경민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