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치 식량밖에 안남았다”/배고픈 모스크바 최악의 겨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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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전기 끊겨 성냥불 켜놓고 환자진료
굶주림과 각종 물자부족에 지쳐있는 모스크바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모스크바시청을 에워싸고 식량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인근 교외 농가들을 습격하는 사건까지 발생하고 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 연방대통령은 식량생산이 많은 공화국들에 9백만 모스크바 시민을 먹여살릴 식량을 긴급 원조해줄 것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모스크바시장은 식량부족에 따른 동요와 시민봉기 위험이 경각에 달했다고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소련은 우크라이나공화국이 지난 1일 주민투표를 통해 독립 의지를 재확인함으로써 연방해체의 초읽기에 들어간 가운데 경제적으로도 최악의 겨울을 맞고 있는 것이다.
수도 모스크바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현지 신문·방송들은 연일 생필품전쟁의 현장을 전하고 있으나 마땅한 대책이 없어 날을 거듭할수록 식량난은 더욱 가중될 전망이다.
첼랴빈스크의 의사들은 최근들어 간호사들이 붙여주는 성냥불을 이용해 환자들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다. 전기공급이 끊겼기 때문이다. 중세로 복귀한 듯한 모습이다.
아스베스트에서는 비누는 물론 살충제가 남아 있는게 없어 어린이들은 들끓는 이 때문에 휘발유를 활용하고 있지만 요새는 그것마저 구하기가 힘든 실정이다.
또 하바로프스크에서는 연료부족으로 비행기가 뜨지 못하는 바람에 발이 묶인 승객들이 활주로에 뛰어들어 시위를 벌였다는 언론보도도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시당국은 5일 육류재고가 하루분밖에 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연방정부 당국자들은 모든 식량을 통틀어 열흘 내지 보름치밖에 남아있지 않다면서 「진정한 재앙」이 닥쳤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소련인들은 이미 생필품부족에 시달려 왔다. 그만큼 부족에 단련된 사람들인 셈이다. 그러나 이번 만큼은 소련인들 인내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심각한 지경이다.
더욱이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 등장이후 개혁정책에 힘입어 당국에 대고 「삿대질할 수 있는 용기」까지 얻게된 소련인들의 구호는 『생필품을 달라』에서 『정권퇴진』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빵·버터·달걀 등을 구하기 위해 상점앞에 모여든 모스크바시민들은 텅빈진열대를 확인하자 곧바로 반정부시위를 벌였다. 이런 모습은 소련 곳곳으로 확산돼가고 있다.
이날 시위를 벌였던 한 중년부인은 『오렌지 한봉지 사려고 봉급의 1할을 써야 한다』면서 『그나마 두달째 오렌지구경도 못했다』고 불평했다.
시베리아 한복판의 야쿠츠크에서는 한 병원이 헌혈하는 사람들에게 셔츠나 부츠 등을 나눠주자 헌혈자가 줄을 잇는 촌극도 벌어졌다.
문제를 악화시키는 요인은 여러가지다. 공화국간,도시간 유통망이 붕괴된 것이 그중 하나로 꼽힐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정치적 혼돈에 따른 현상이다.
이제 소련내 모든 공장의 장비는 낡아 폐품상태에 놓여있다. 밀가루·사료로부터 야채·빵에 이르기까지 생산량이 떨어졌다. 전국적인 부정·부패현상과 암시장 때문에 가뜩 심한 물자부족현상을 악화시키고 그나마 남아있는 물품가격을 인상시키고 있다.
물자부족은 민족 또는 인종분규나 종교 마찰이 심한 지역일수록 극심하다.
이같은 식량난과 물자부족난은 쿠데타 가능성,극우세력에 의한 구질서의 복귀움직임 등에 대한 루머를 양산함으로써 사회불안을 확대시키고 있다.<모스크바=김석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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