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넘게 한 집서 산 사람 몇이나 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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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규 경제부총리는 15일 예정에 없던 기자회견을 급하게 잡았다. 재정경제부와 국세청, 행정자치부 실무 책임자까지 동원됐다. 권 부총리는 이 자리에서 부동산세금 폭탄이 현실로 다가왔다는 언론 보도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권 부총리의 이날 기자회견은 노무현 대통령의 최근 발언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인터넷 언론과의 회견에서 "종부세를 줄이기 위해 싼 곳으로 이사 가면 양도세를 내고도 돈이 한참 남는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건설교통부가 14일 아파트 공시가격을 공개한 뒤 집을 한 채만 가진 사람에게도 '퇴로'가 없다는 지적이 나오자 권 부총리가 직접 나서 대통령 발언을 뒷받침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날 권 부총리의 논리는 현실을 감안하지 않은 행정편의주의 발상이 많았다는 지적이다. 권 부총리의 발언을 조목조목 짚어 봤다.

#1 양도소득세 부담 과연 적은가

권 부총리가 이날 든 사례는 15년 이상 강남의 한 집만 가진 사람을 기준으로 삼았다. 이 경우 장기 보유 특별공제를 받을 수 있어 양도세가 확 준다. 그러나 당장 강남에서 한 집에서만 15년 이상 산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가 문제다. 강남구 대치2동 동사무소 관계자는 "강남은 생활 여건이 좋아 이사를 해도 강남에서 옮겨 다닌다"며 "다만 한 집에서만 10년 이상 산 사람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양도세 장기 보유 특별공제를 받을 수 있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많지 않은 사례를 들어 양도세 부담이 적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전인수식 해석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2 이사 가면 해결될까

권 부총리는 강남의 32평 아파트를 팔면 분당으로 집을 넓혀 가고도 많은 현금을 확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분당에서도 집값은 천차만별이다. 강남 아파트보다 비싼 곳도 많다. 더욱이 교육 여건이나 생활 환경도 다르다. 대치동 은마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모(50)씨는 "아들 교육 때문에 학원이 몰려 있는 강남으로 2년 전 이사 왔는데 느닷없이 종부세 부담이 무서우면 이사 가라니 기가 찬다"고 말했다. 이사는 친구와 지인, 생활 환경 등 각자 선호하는 게 다르기 때문에 정부가 이래라 저래라 할 게 아니란 것이다. 이씨는 "강남 사는 사람은 분당으로 가야 한다면 분당.목동.용산 살던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3 서민은 부담 없나

종부세를 낼 사람이 전체 세대의 2.1%밖에 안 되기 때문에 서민은 상관이 없다는 게 정부 논리다. 집값이 6억원 이하인 사람도 공시가격이 올라 재산세 부담이 늘 수는 있지만 한도가 있어 세금 증가율이 10%를 넘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방은 수도권에서 거둔 종부세를 배정받아 교육.복지에 쓸 수 있기 때문에 지방 서민은 세금보다 더 많은 혜택을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의 시각은 다르다. 대다수 다주택자가 내년 새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집을 안 팔고 버티면서 전.월세에 종부세를 전가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집 없는 서민의 부담만 가중될 수 있다는 얘기다. 용산구 B공인 관계자는 "2005년 8.31 대책이 나왔을 때도 다주택자들이 종부세 인상분만큼 전.월세를 올렸다"고 설명했다.

#4 선진국보다 주택세금 적은가

권 부총리는 주택분 보유세를 다 합쳐 봐야 10억원짜리 집의 경우 집값의 0.4% 정도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이는 미국 주요 도시 1.5~1.6%나 일본 1%보다 훨씬 낮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진국과 집의 개념이 전혀 다른 국내에 이 비율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건 무리라는 지적이다. 미국에서는 집이 여러 가지 자산의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소득과 비교한 집값도 우리보다 낮다. 그러나 국내에선 집이 전 재산인 가구가 대부분이다. 소득에 비해 집값도 비싸다. 이런 차이를 무시하고 집값 대비 세금 비율만 비교하면 착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소득과 주택 관련 세금을 비교해야 납세자가 피부로 느끼는 세금 부담을 제대로 가늠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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