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cover story] 망년회 '술'년회는 싫어 … 우린 별나게 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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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예년처럼

때는 지난달 말. 화장품.건강식품 등을 만드는 서울 논현동의 생명과학기업 STC 본사 지하 접견실에 올해 입사한 새내기 사원들이 모였다. 모임 주제는 '송년회를 어떻게 열 것인가'. 이들은 동기 모임에 '난로 위의 고구마'라는 별도의 이름을 붙이고, 부서가 달라도 매주 수요일 점심 식사를 함께할 정도로 동료애가 남다르다. 하지만 이날은 나이 차(23~30세)만큼이나 의견 대립이 날카롭다. 자칫 '세대 간 갈등'마저 일어날 판이다.

"스키장 어때? 건강도 챙기고 겨울 분위기도 내고."

"단체로 영화 보고 시원한 맥주 한잔, 좋잖아~."

"그냥 고기 굽고 마이크나 잡지 뭐."

"그러지 말고 지난번 갔던 가평 펜션에 MT나 다시 가자."

요즘 어느 사무실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가 오간다. 격론 끝에 결정난 것이'제2차 가평 진출'. 하지만 뭔가 빠진 것 같다는 분위기다. '색다른 송년회가 그렇게 힘든 걸까'하는 눈치. 아니나 다를까 상대적으로 젊은(?) 여자 동기들의 표정이 뚱하다.

*** 이대로 망가질 순 없다

결국 여자들이 '거사(擧事)'를 벌였다. "이번 송년회만큼은 술로 망가지기 싫다"는 얘기다. 그들이 고민 끝에 찾아낸 것이 '파티' 형식의 송년회. 그러나 반발도 만만찮다. 젊은 샐러리맨들에게도 파티는 역시 낯선 단어다.

"파티 가려면 턱시도나 등이 파인 드레스 같은 거 입어야 하는데…."

"그뿐이냐? 파티에서는 우아한 모습만 보여야지, 말 실수도 안 해야지, 그게 뭐가 재미있겠어. 또 다른 스트레스지."

"그냥 고기집 할까? 귀찮은데."

금방이라도 다시 술로 망가지는 '망(亡)'년회로 돌아갈 것 같은 위기의 순간, 누군가 말을 꺼낸다.

"그래도 한번해 보자. 거창한 것 말구, 우리끼리 즐기는 파티 말야. 재미있을 것 같잖아?"

*** 처음은 역시 '어색'

지난 2일 정오,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러시안 레스토랑 '푸쉬킨'에 깔끔하게 차려 입은 '고구마' 멤버 열명이 모였다. 난생 처음 열리는 대낮 송년 파티가 어색한지 모두들 멋쩍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앞장서 파티를 준비해온 박주희(26.홍보팀)씨가 간단한 '브리핑'을 시작한다.

"오늘은 맛있는 점심을 즐기고, 편을 갈라 '리스(wreath.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많이 쓰이는 고리 형태의 꽃장식품)' 만들기 게임도 해보려 해. 우리가 만든 걸 회사 간부들에게 경매에 부쳐 수익금은 불우이웃 돕기에 쓸 생각이고 말야."

박씨의 말에 슬슬 분위기가 달아 오른다.

*** 특별한 추억, 색다른 즐거움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박씨가 또 다른 깜짝 이벤트를 제안한다. 바로 '롤링 페이퍼'다. 참석자들의 이름이 각각 적힌 카드를 돌려가며 그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는 게임이다.

"이거 여고생들이나 하는 것 아냐?"

"겁난다, 야. 잘못하면 군대에서 소원수리할 때처럼 나쁜 말만 잔뜩 쓰여 있으면 어떡하지?"

가벼운 농담이 오가지만 막상 펜을 들자 모두 진지해진다. 가장 나이가 많은 고기혁(30.영업기획팀)씨의 카드엔 형.오빠처럼 따르는 동기들의 믿음과 신뢰가 듬뿍 담겨 있다.

"오라버니~, 많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늘 열심히 하는 모습 멋져. 앞으로 그 열정 그대로 화이팅."

최근 교통사고를 당해 몸이 좋지 않은 한희석(28.영업기획팀)씨의 카드엔 건강을 기원하는 메시지로 가득 채워졌다.

"수다쟁이 희석 오빵~ <<. 늘 밝게 웃으면서도 동료들 챙겨주는 든든함에 반했다우. 빨리 건강 회복하세용."

동료들의 카드를 받아본 참석자들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번져 간다.

*** 즐기며 배운다

음식이 테이블에 오르자 모두들 신이 났다. 와인잔으로 건배를 하고, 디지털 카메라로 서로를 찍어 주느라 정신이 없다. 식사가 끝날 무렵 '고구마' 팀의 테이블 앞에 두명의 낯선 여인이 등장했다. 파티 이벤트 전문 업체 '핑크 핑크' 소속 파티플래너인 임성은.서윤정씨다. 크리스마스 리스 만들기 게임을 돕기 위해 온 것.

"간단한 리스 하나로도 겨울 분위기를 한껏 낼 수 있어요. 가격 때문에 생화가 부담스럽다면 조화도 괜찮고요."

설명이 이어진다.

"꼭 돈을 많이 들이지 않고도 집안에 돌아다니는 물건을 이용해 개성 넘치는 장식을 만들 수 있답니다. 아이가 있는 집에선 장난감으로 쓰이던 인형을 장식으로 사용해 보세요. 옥수수 등 말린 과일을 사용해도 좋거든요."

'강의'가 끝나자 다섯명씩 두 팀으로 나뉘어 게임을 시작한다.

"자, 우리팀의 장식 주제는 시계로 하자."

"그래? 우리 팀은 그럼 무조건 '럭셔리'하게(호화롭게) 가자."

말은 그럴 듯하지만 처음 해보는 거라 양팀 모두 실수연발이다.

"구슬이 비뚤어졌잖아."

"모르는 소리 마. 정말 진정한 예술은 동시대에선 평가를 못 받는다니까."

옥신각신하는 사이 양팀 모두 원래 의도는 오간 데 없고 정체불명의 리스가 탄생했다.

마침내 경기종료와 함께 내려진 전문가의 판정.

"아무래도 개성과 균형미를 살린 '럭셔리팀'이 좀 더 괜찮은 것 같아요."

"와아~" "우우우우~"

*** 파티가 끝나고 난 뒤

어느새 몇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서운했던지 하나같이 아쉬운 표정이다.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특히 우리도 즐기면서 불우이웃을 도울 수 있어 의미있었구요." 한희석(28.영업기획팀)씨.

"파티란 게 서양 문화라 그런지 사람들이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외국 방식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생각 말이죠. 그런데 막상 해 보니 얼마든지 우리 멋대로 즐길 수 있는 것 같아요." 김샛별(24.인터넷 비즈니스팀)씨.

"지금껏 파티란 것은 귀찮고 좀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늘 보니 '일상 탈출'이란 게 생각보다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닌데요." 김청일(26.상품전략팀)씨.

생애 첫 '파티 송년회'를 치른 새내기 사원들이 소감을 밝혔다. 아무래도 이들의 사무실에는 머지 않아 또한번의 송년 파티가 열릴 것 같다.

글=표재용.김선하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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