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흐름 제대로 잡아야/심상복 경제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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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자금난이다,고금리다 해서 일그러진 기업들의 얼굴이 좀처럼 펴지지 않고 있다.
통계가 보여주는 총통화증가율은 19% 안팎으로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닌데도 기업들은 돈이 말랐다고 아우성이다.
올들어 계속되고 있는 이같은 통화논쟁속에 최근 실시된 외환은행 신주청약건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외환은행이 증자를 위해 지난 11∼20일까지 실시한 주식공모에 자그마치 1조2천7백억원이란 거금이 몰려들었다. 그중 마감일인 20일 하룻동안에만 몰려든 돈이 절반가까운 6천억원이나 된다.
1주당 7천원에 사 곧 장외시장에서 되팔 경우 9천원 정도는 받을 것으로 예상되자 장롱속이나 은행·증시주변을 맴돌던 돈들이 몰려든 것이다.
이번 사례는 평소에는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지 「현주소」를 파악하기 힘들지라도 돈이란 「돈되는 곳」으로 몰려들게 마련이라는 돈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시중에 돈이 적잖이 풀려 있다는 반증도 된다.
업계에서는 그러나 올들어 도산기업이 4천개에 달할 정도로 자금사정이 어렵고 따라서 돈을 더 풀어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돈의 양이 아니라 돈의 흐름이다. 돈이 생산부문으로 흘러가지 않는 여건에선 돈을 아무리 풀어도 소용없다.
아니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물가불안이라는 치명적 피해를 국민경제에 줄 수 있다.
지난 여름 이후 부동산값이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고 방심할 수도 없다. 주택시장에 「약간의 충격」이 가해질 경우 어떤 형태로 상황이 반전될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제대로 잡힌 돈의 흐름이란 개인의 여유자금을 제도권 금융기관이 흡수하고 금융기관은 이 돈을 생산성이 높은 기업에 공급하는 것이다.
말이야 간단하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이냐는 반문이 당장 나올테지만 머리를 짜내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금리자유화시대에 은행들에 신상품 개발폭을 넓혀주고 「진짜」경쟁을 유도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거꾸로 돼있는 장·단기 예금금리체계를 바로 잡는 일도 중요하다.
보다 근본적인 대책인 금융실명제가 다시 추진돼야 하며 그 중간단계로 비실명 금융자산에 대한 세금을 더욱 무겁게 매기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다.
금융정책 당국자들은 통화수준을 얼마로 유지하느냐 보다도 돈이 「딴데」로 흘러가지 않도록 하는 문제에 대해 더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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