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의 황금 세대' 추억 속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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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C의 동료 선수들이 KCC-동부전을 끝으로 정든 농구 코트를 떠나는 김영만을 헹가래치고 있다. 그의 은퇴로 1990년대를 풍미했던 기아 농구는 역사 속에 남게 됐다. [전주=뉴시스]

'기아 황금 세대'의 막이 내렸다.

프로농구 KCC의 김영만이 13일 전주에서 벌어진 동부 전을 마지막으로 코트를 떠났다. 그의 은퇴로 김유택(44)-한기범(43)-허재(42)-강동희(41)-김영만(35)으로 대표되는 기아농구는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됐다. 13일 오후, 경기가 벌어지기 전 허재 KCC 감독과 강동희 동부 코치, 그리고 김영만이 전주 리베라 호텔에서 잠시 만났다. 김영만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함께한 형들"이라며 "경기가 안 풀리면 소주 한잔으로 뭉쳤고, 혈기 왕성한 시절(95년 농구대잔치)에는 셋이 모여 '꼭 이기자'며 혈서를 쓰기도 했다"고 했다.

김영만은 70-77로 뒤진 4쿼터 8분29초에 교체 투입돼 경기 종료까지 뛰며 2득점.1리바운드를 기록했다. KCC는 72-79로 졌다.

1986년 창단된 실업팀 기아는 농구대잔치 6회, 프로농구 원년(97시즌) 챔피언을 지냈다. 97~98, 98~99시즌에는 준우승이었다. 2001년부터는 모비스로 주인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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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만이 기억하는 한기범은 '팀의 기둥(경기)이자 점잖은 양반(성격)'이었다. 김유택은 꼼꼼함의 대명사였다. 또 센터도 테크닉이 뛰어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강동희는 완벽한 경기 운영으로 '슈터 김영만'을 낳았다. 그는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공을 전달했다. "선배에겐 덤벼도 후배들은 끔찍이도 위했던" 허재는 지고 못 사는 해결사였다.

김영만은 이상적인 3번(스몰포워드)이었다. 그는 "센터 출신이었기에 미들 지역에서 다양한 공격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선배들이 공격에 치중할 때 궂은일을 도맡았다. 그래서 김영만은 "슈터도 수비를 잘할 수 있다는 모범을 보인 게 내가 남긴 업적"이라고 했다.

마산고 시절부터 김영만의 슛은 막기 어렵기로 소문났다. 뒤로 점프를 해 손목 스냅만으로 슛을 던졌기 때문이다. '사마귀 슈터'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2000~2001시즌까지 평균 20점대를 기록했고, 2004~2005시즌까지 경기당 10점대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난 시즌(4득점)부터 급격히 내림세를 그렸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기 시작하면서 은퇴를 생각했다"고 했다. 김영만은 은퇴 후 모교인 중앙대 코치로 간다.

전주=강인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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