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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 괴담 헛소문이 되게 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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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 FTA를 막판에 무산시킨 뒤 책임을 미국에 돌려 반미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진보 진영 재집권을 노린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하지만 제8차 협상까지 끝난 지금 그런 의혹은 접어도 좋을 것 같다.

노 대통령은 13일 오전 "한.미 FTA를 체결하고, 비준으로 가는 것은 정치적 부담이 크다"며 "하지만 반대를 예측하고 시작했으니 그런 걸 너무 정치적으로 고려하지 말고, 철저하게 경제적 이해관계를 고려해 협상해 달라"고 말했다. 실리 위주로, 장사꾼의 원칙으로 협상에 임하라는 당부도 했다.

7일 방한한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을 만났을 때도 노 대통령은 "한.미 FTA의 영향은 미국보다 우리가 훨씬 더 크고 국민도 더 불안해한다"며 "정치적으로 어려운 선택이었다"고 술회했다.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노 대통령은 한.미 FTA 때문에 많은 걸 잃었다. 정치인은 지지 세력의 눈치를 보는 게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한.미 FTA를 밀어붙이면서 그는 진보와 좌파 진영으로부터 외면당했다. 공격도 받았다.

노 대통령이 왜 정치적으로 자신에게 아무런 득이 없는 한.미 FTA를 강행했을까. 반대파로선 여러 가지 주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기업인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아서"라든지 "외국 자본 앞잡이인 매판 관료들한테 속아서" 또는 "좌파를 표방했지만 사실은 우파였다"는 등이다.

얼핏 보기에도 말이 안 된다. 그보다는 "아무리 고민해도 국가 경쟁력을 키우려면 개방을 안 할 수 없고 그러려면 미국과 먼저 FTA를 맺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라는 분석이 비교적 진실에 가까울 것 같다.

노 대통령은 그동안 많은 외국을 돌면서 동포들도 만나고, 현지 공장들도 방문했다. 그 과정에서 국익의 중요성, 국가의 힘을 생각하게 됐을 것이다. 꼭 노 대통령이 아니라고 해도 마음을 비우고, 곰곰이 따져 보면 상황은 명백하다.

무역 의존도가 80%인 나라에서, 천연자원은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좁다란 땅덩어리에서, 주식 투자의 절반이 외국 자본인 경제 시스템에서 개방을 안 하고 살 방법은 없다. 이미 국내의 유동 자금도 각종 펀드의 형태로 중국과 베트남에 투자되고 있다.

우리 영화와 드라마를 수출해 한류(韓流)를 만들어 내면서 다른 나라 문화는 수입하지 않을 묘책도 없다. 유통시장이 개방돼 외국 자본인 까르푸와 월마트가 들어오면 국내 유통 업체들이 망할 줄 알았지만 정반대로 국내 기업들이 그들을 인수한 건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소비자 입장을 따져 봐도 마찬가지다. 서비스 시장이든 농산물을 포함한 일반 상품이든 개방을 통한 경쟁 심화는 대체로 독점의 붕괴나 가격 하락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그게 소비자에게 나쁠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한국이 FTA 같은 걸 하지 않고 국가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인다. 그러니 반(反)FTA 시위대는 먼저 어떻게 국가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지 대안을 제시한 뒤 시위를 하든지, 화염병을 던져야 할 것이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미국과 FTA 협상을 하고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국은 다른 나라들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고 말한다. 당장 호주와 뉴질랜드.중국 등이 후끈 몸이 달아 "FTA 협상을 추진하자"고 요청한다는 것이다. 미국산이 한국에 무관세로 들어오는 마당에 이들도 대책이 필요할 것이다.

싫든 좋든 개방과 경쟁이 이 시대의 조류라는 건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이겨나가든가, 아니면 낙오할 뿐이다. 문 닫아 걸고 세상을 외면하다 결국 식민지가 됐던 슬픈 과거를 되풀이할 수는 없다.

김종혁 사회부문 부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