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의 위업(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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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울 성북동 좁은 도로를 한참 올라가다 보면 성북국민학교와 인접한 곳에 나지막한 구릉이 나타난다. 울창한 수풀로 둘러싸인 이 구릉위에 자리잡고 있는 아담한 2층건물이 유명한 간송미술관이다.
국내최대 문화재 컬렉션중의 하나인 이 미술관에서는 지금 간송 전형필 선생의 30주기를 맞아 그가 평생 모은 문화재 중에서도 정수만을 골라 특별전을 열고 있다. 전시품목 가운데는 국보 74호인 청자오리형연적을 비롯,국보 10점·보물 11점등 모두 1백점을 선보이고 있는데 간송이 직접 그린 문인화 몇점도 자리를 같이해 그가 서화가로서 일가를 이루고 있었음을 엿보게 한다.
간송이 일제하에서는 물론 광복후에도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고 가꾸는데 보인 선각자적 안목과 열정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의 미술품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돈있는 수집가의 호사취미가 아니라 민족적 자존심이었다. 따라서 그의 고미술품 수집과 관련해 전해 내려오는 일화들이 적지 않다.
바로 청자오리형연적을 비롯한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일본에서 사들일 때의 일이다. 당시 도쿄에는 존 캐스비라는 영국변호사가 있었는데 그는 고려자기수집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한국과 중국에서 모아들인 숱한 문화재를 팔려고 내놓았다.
이 소식을 들은 간송은 그 문화재들이 일인손에 들어갈까봐 즉시 도쿄로 달려갔다. 그리고 캐스비에게 조선의 문화재는 조선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그것을 자기에게 팔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캐스비는 시일을 질질 끌기만 했다. 간송은 일단 귀국했다.
그런데 이같은 사연이 일본신문에 크게 보도되고 간송의 애국심을 칭찬하게 되자 캐스비는 크게 당황했다. 그 길로 간송을 찾아와 『당신의 애국심에 감동했다』면서 수집품을 몽땅 내놓았다. 엄청난 값이었다. 그러나 간송은 그것을 모두 사들였다.
간송에게는 하나의 기벽이 있다. 그는 마음에 드는 글씨나 그림을 보면 자리를 뜰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사들인 다음 밤늦게 혼자 감상하는 것이다. 이같은 미술품에 대한 높은 안목과 열정,그리고 민족적 자존심이 문화유산을 지키게한 원동력이 되었다.
요즘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외국의 경매장에서 남의 손으로 마구 팔려나가는 것을 보면서 새삼 간송의 위업을 기리게 된다.<손기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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