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 뭐, 이런 책이 다 있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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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종이로 만든 사람들
살바도르 플란세시아 지음, 송은주 옮김
이레, 320쪽, 1만4000원

혹시 토성이 사는 집에 대해서 들어본 일이 있는지 모르겠다. 토성에게 무슨 집이 필요한 건지 알 수 없지만, 이 소설을 읽다보면 이런 문장에 맞닥뜨리게 된다.

"내가 선 자리 바로 위가 옛날에 수도사가 하늘을 기워 붙인 장소였던 것이다. 나는 캘리포니아의 하늘에 구멍을 다 뚫은 다음 카네이션 칼을 숨기고 신문지와 풀로 만든 총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구멍 테두리를 꽉 잡고 토성의 집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134쪽)

그 집에서 토성이 하고 있는 일은? "그는 벌거벗은 채 대자로 뻗어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게다가 토성은 좀 어벙한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있다.

독자라고 이게 무슨 상황인지 쉽게 이해될 리 없다.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태어나 지금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영어로 소설을 쓰는 살바도르 플라센시아가 처음 쓴 이 소설은 이처럼 낯설기만 한 상황들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주인공은 마분지 다리, 종이 가슴 등 '종이 인간' 페데리코다. 그의 야뇨증 때문에 아내가 도망간 뒤 딸과 함께 로스앤젤레스 주변 꽃마을로 이사한다. 그리고 거기서 마을을 감시하는 토성과 맞서 싸우는데 그 토성은 다름아닌 작가 자신이다. 어찌 보면 액자소설 같고 또 달리 보면 판타지로, 읽는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소설 속 상황만 낯선 게 아니라 형식 자체도 괴이하다. 검은 잉크로 소설의 내용 일부를 가려놓기도 하고 등장인물의 이름이 인쇄된 부분을 칼로 도려내놓기도 했다. 다단 편집을 통해 화자가 번갈아가며 사건을 서술하는 건 그나마 고전적인 실험에 속한다. 연전에 나온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연상시킨다.

그렇긴 해도 플라센시아 쪽이 훨씬 더 정치적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어벙한 토성과 등장인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을 다루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전쟁소설이란 말이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같은(말이 되나?).

소설의 결말을 말하자면, 토성이 진다. "그들은 남쪽을 향해 토성이 좇을 수 있는 발자국을 전혀 남기지 않은 채 페이지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 슬픔에는 어떤 속편도 없을 것이다."

아직 소설도 읽지 않았는데 결말을 말했다고 해서 비난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사실 이 결말도 중간 부분에 미리 나오니까. 이 결말을 얘기해주는 화자는 바로 토성이다. 이쯤이면 현대소설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맞다. 그렇게 해서 저렇게 되는 그런 이야기이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 대한 회의, 포스트모던의 시점, 복화술사, 내러티브의 붕괴…, 그리고 (누군가의 존재증명을 위해 활용되는) 문학의 죽음 등등.

하지만 이 소설은 문학의(죽음이라뇨? 선생님) 새로운 국면에 더 많은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핵심은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멕시코 국경도시 티후아나다. 티후아나에서 미국으로 입국하려는 멕시코인들은 대략 2킬로미터에 걸친 보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야만 한다. 그건 제3세계를 떠나 제1세계로 들어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은유의 행렬과 같다. 하지만 이렇게 입국한 멕시코계 이민자들이 미국 사회 안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더 기나긴 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그 와중에 나온 게 바로 치카노 문학, 즉 멕시코계 이민자들의 문학이다.

책에서 토성과 전쟁을 벌이는 프로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토성을 막는 유일한 길은 우리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는 것뿐임을 알았습니다." 이게 바로 치카노 문학, 혹은 모든 이민자 문학이 향하는 목적지다.

간단하게 말해서 문학은 침묵의 얼굴에 입술을 그려주는 행위다. 그 다음에는 그 입술이 혼자서 떠들어댈 것이다. 그게 짐작하던 대로의 이야기든,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이야기든, 처음으로 입술을 가진 침묵은 수다스럽게 떠들어댈 것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말하지 못했던 입술에게서 듣는 이야기만큼 놀라운 상상력의 세계가 어디 있을까? 플라센시아의 이 소설은 적어도 미국에서는 문학이 죽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걸 보여준다.

김연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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