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문화유산에 깃든 사상까지 담아낸 답사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9면

의식각성의 현장
조동일 지음, 학고재, 232쪽, 1만3000원

뚝배기보다 장맛이라 했던가. 제목은 딱딱하거나 고리타분하리란 선입견을 갖게 한다. 이에 겁먹거나 꺼리지 말고 책을 들추면 별세계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줄곧 한국적 인문학을 주창해온 노교수가 한국인의 의식세계에 굵직한 자취를 남긴 깨달음의 현장을 살핀 '문화유산답사기'다. 지은이는 30여 곳을 다닌 끝에 26편의 글을 묶었다. 한국 사상이 싹튼 곳, 우리 역사와 땅에 대한 자의식을 보여준 지식인들의 자취, 판소리와 전통 소설의 현장, 외적의 침입에 맞섰던 영웅들의 고향, 시대와 불화했던 지식인들의 창조적 업적이 서린 현장 다섯 갈래로 나뉜 글은 하나하나 각별한 의미를 캐낸다.

경북 영주 부석사에서 신라 시대 고승 의상의 자취를 좇는 글이 대표적이다. 부석사를 보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단다. 아름다움을 눈으로 즐긴 다음 부석사를 세운 의상대사와 중국 소녀 선묘의 애달픈 인연에 젖는다. 전설에 귀 기울였으면 문헌을 파고들어 내력을 알아본다. 또 의상의 저술을 살펴 그의 설법 내용을 궁구하니 심안(心眼)으로 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육안으로 본 것에다 심안으로 본 것을 보태고, 본 것과 보지 않은 것을 합치는 방법이다. 부석사를 밑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의상이 말한 바에 내가 본 것을 가지고 시비하란다. 이렇게 보면 스산한 절터, 고쳐 지은 정자, 닳아버린 석비 그 어느 하나 뜻이 없는 것이 있을까.

"부석사 안양문을 거쳐 무량수전으로 올라 갈 때에는 왼쪽으로 틀어야 한다. 길을 찾았다고 해서 그대로 나아가기만 하면 안 된다. 그냥 가기만 하는 길은 담과 다를 바 없다. 방향을 바꾸는 비약이 있어야 담이 다시 길이 된다." 부석사 답사기인 '마음이 트이니 길이 열린다'에선 건물 배치에서까지 선인들의 속내를 헤아린다.

다시 책을 들춘다. 글은 정갈하고 내용은 그윽하다. 보고 듣고 느낀 것만이 아니라 역사와 문학, 철학이 깃든 덕이다.

김성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