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민간·왕족 모두 즐겨 '한국 골프'엔 격구의 전통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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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구(擊毬.그림)는 민속놀이이면서 동시에 전통 무예였다. 말을 타고 긴 막대를 이용하여 공을 치는 격구의 모습은 오늘날의 폴로를 연상시킨다. 격구의 생생한 그림을 전하는 곳은 조선시대 군사 훈련 교본이었던 '무예도보통지'다. 무예 연마용이었기에 무과 시험과목에 포함돼 있었다. 놀이와 무예를 병행한 선인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격구의 일종인 '격방'(擊棒: 棒은 '훈몽자회(訓蒙字會)'에 '막대기 방'으로 설명하고 있음)도 성행했다. 격방은 넓은 마당에서 막대기로 공을 쳐서 구멍에다 넣는 방식으로 오늘날 골프와 흡사하다. 또 필드하키와 유사한 '장구(杖毬)'라는 놀이도 있었는데, 당시에는 격방.장구.타구(일명 장치기) 등을 통칭해 격구라 했다.

조선시대 격구는 궁중에서부터 민간 어린이들까지 광범위하게 즐기던 놀이문화였다. 혜정교(현 광화문우체국 옆)거리에서 곽금이.막금이.막승이.덕중이 네 녀석의 타구놀이 모습이 '태종실록'13년 2월조에 나온다. 갖고 노는 공에다 태종과 효령군.충령군.하인으로 각각 이름을 붙였는데, 한 녀석이 친 공이 다리 아래 물속에 빠지자, 옆에 있던 녀석이 "효령군이 물에 빠졌다"라고 소리친 것이다. 마침 지나가던 효령군댁 유모가 대사헌 정역(효령군 장인)에게 일러 바쳐 사건이 커지고 말았다. 실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당시 세자로 책봉된 양녕이 이미 태종 눈 밖으로 밀려났고, 효령 또한 왕위 계승에서 탈락할 위기에 있었던 예민한 정치상황과 결부시켜 읽히기도 한다.

조선 초기에는 격구가 매우 성행해서 2대 임금 정종은 격구광이었고, 태종과 세종도 종친이나 신하들과 자주 격구를 즐겼다. 궁궐에서의 격구는 기마 격구가 아니라 대개 격방이었다. 궁중 격구는 조선 중후기로 오면서 점차 사라진다. 고요한 수양을 중시하는 성리학 이념이 정착되면서 궁중에서의 연희 문화가 줄어드는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 골프가 유행하는 것을 보면 내재돼 있던 우리 민족의 '격구 유전자'가 다시 표출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골프선수들이 세계대회를 휩쓰는 것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은 아닌 것이다.

박홍갑<국사편찬위원회 연구편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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