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1부] 여름 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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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림=김태헌

곰탱, 잘 지내고 있는지. 처음엔 잘 몰랐는데 위녕이 날이 갈수록 널 닮아가고 있어. 흑흑. 분명 너도 실망스럽지? 그러니까 다섯 달 후 네가 출옥할 때, 분홍 리본을 맨 작은 꽁지가 웃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말도록. 네 얼굴에 분홍 리본을 맨 여자 생각을 해봐…. 끔찍? 하지만 걱정마. 우리 위녕은 널 닮았는데도 불구하고 신기하게 너무나도 예뻐. 조금 더 지나 아빠를 찾으면 거울을 보여줄 생각이야. 지난번에 어머니랑 형님이 면회 가시는 길에 내가 보내준 스웨터 잘 받았지? 내가 짠 거야. 밤에 잘 때 내 생각 나면 스웨터가 나라고 생각하고 두 손을 가슴에 모아봐. 스웨터가 나처럼 포동거리진 않아도 쓸 만은 할 걸.

낮이면 어떻게든 아이를 실컷 놀려서 밤이 되자마자 곯아떨어지게 하면 밤 시간이 좀 남아. 스웨터를 다 짜고 나니까 너무 많은 생각이 나기 시작하더라. 그래서 요즘은 소설을 시작했어. 네가 쓰던 그 타이프라이터를 내가 잠시 빌려 쓰고 있는데 중고라 그런지 소리가 커(내가 이 소설 다 완성해서 돈 벌면 우리 좋은 타이프라이터 꼭 사자!). 하지만 이것도 괜찮기는 해. 밑에다 두꺼운 타월을 세 장쯤 받쳐놓으니까 소리가 좀 덜 나더라구. 우리 옛날에 노동운동하던 시절에 구로동 지하 자취방에서 몰래 유인물 만들 때 하던 대로 말이야. 그땐 경찰의 눈을 피했는데 지금은 행여 위녕이 깰까봐 하는 거니 다르겠지. 노동운동하던 시절에 익힌 게 이념뿐이 아니라 이런 생활의 지혜도 있다니 새삼 우스웠어. 네가 나올 때까지, 완성하는 게 목표야. 1500매쯤 쓰려고. 열심히 해야지. 행여 네가 가석방이라도 되는 날에도 중반은 넘어가 있을 수 있도록 말이야. 곰탱, 나 없어도 잠 잘 자고 먹는 거 잘 먹을 것. 알았지? 절에 들어가 있다 치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거 잊지 말고 진정한 민주화의 그날까지 열심히 살자! 쫍!(이건 뽀뽀 보내는 소리)

곰탱의 꽁지가

스무 살에 만난 엄마와 아빠가 서로를 곰탱이와 꽁지로 불렀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다. 이렇게 애틋하게 서로를 그리워하며 스웨터를 짜던 시간이 있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아빠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일 년 남짓 갇혀 있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으며 그리고 엄마가 그 시절에 혼자서 날 키우면서 밤마다 타이프라이터 밑에 타월을 두껍게 깔고 첫 소설을 썼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스무 살. 스무 살. 아빠와 엄마가 처음 만났다는 그 청춘의 시간. 이 여름이 한 번 더 지나면 나도 곧 그 터널로 진입하게 되겠지. 나도 누구와 사랑을 하게 될까? 나도 누구와 그렇게 결혼을 하고, 감옥에 있는 남편을 기다리며 아이를 낳고 그리고 이혼을 하게 되는 걸까? 그토록 그리워하던 시간이 있었다는 것도 잊어버리는 것이 어른이 된다는 것일까. 어른이 되면 사랑하고도 아이를 낳고도 그렇게 쉽게 헤어질 수 있는 걸까, 하는 오래된 의문이 이미 내 살처럼 굳어버린 금기의 횡경막을 뚫고 내 목줄기로 꾸역거리며 올라왔었다. 아빠의 책상 서랍 안쪽에 끼어져 파괴를 면한 그 편지는 내게 아빠와 엄마의 애틋한 사랑을 전달해 준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편지를 백 번도 더 읽었다. 뉴질랜드 남섬에 있는 크라이스트처치 시에서 엄마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엄마에 대해 그토록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힌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것은 배신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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