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문화의 인플레시대/김동수(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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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는 철철 넘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 같다. 풍요라기 보다는 과잉과 낭비가 넘치는 인플레 사회­. 경제적인 인플레만이 아니다. 부정입학 인플레,졸부 인플레등에서부터 정치 인플레,범죄 인플레등 헤아릴 수 없는 갖가지 사회의 악성인플레 증상이 넘쳐 곧잘 세상을 움츠러들게 한다.
이런 인플레 증상중에서 가장 악질적인 것으로 말의 인플레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말의 인플레란 곧 인간정신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도덕성을 평가절하하는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도덕성의 평가기준
풍성하게 쏟아지는 말들,그 중에서도 고결한 품성과 인격을 갖추고 있다고 자부하는 인사들의 훌륭하지만 평가절하된 말의 홍수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 홍수에 휩쓸려 정상적인 우리의 삶마저 떠내려 간다.
우리네 처럼 국가·민족·정의와 민주주의라는 말의 인플레 속에서 사는 사람들도 그렇게 많지는 않을성 싶다. 정치한다는 사람에게서부터 데모한다는 학생 모두가 입만 벙긋하면 외치는 이러한 고매한 가치에 우리는 헛배만 불러 있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자기아내나 이웃사랑한다는 말은 좀스러워 못하고 애국애족해야 사람구실 하는 것으로 뽐내려든다. 기름칠한 미사여구와 천번 들어도 마땅한 어휘들을 동원해 대중들의 정신을 마사지하듯 주물럭거리려는 축이 많다.
그런데 이런 말도 마구 쓰다보면 경제의 인플레와 마찬가지로 가치나 효용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천박한 말이 되어버린다.
말의 효용이 떨어지다 보니 그 강도를 높일 수 밖에 없다. 「범죄와의 전쟁」「총체적 난국」「특단의 조처」등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살벌하고 극단적인 언어가 일상생활에 파고들고 있다.
마치 고단위 항생제를 쓰듯,경제 인플레에서 고액권 지폐 찍어내듯 강도높은 말들이 횡행한다. 그런 언어속에서의 생활이란 끊임없는 긴장속에서 살아갈 것을 강요하고 웬만큼 끔찍한 일에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을만큼 둔감하게 만들고 심성을 마비시켜 버린다.
그런 현상들이 누적되다 보면 평범한 언어생활까지 망가져 말의 의미를 왜곡시키고 본래의 뜻마저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 대표적인 예가 최근 우리 사회에서 마구 쓰이고 있는 「문화」라는 용어다.
아마 이말처럼 우리사회에서 인플레 현상을 보이며 과소비 되는 어휘도 드물것 같다. 무슨 말에든 꼬리표처럼 매달려 그것도 대체로 부정적인 사회현상을 나타내는 것처럼 쓰이고 있다. 그런 예를 달포 동안만을 거슬러 보아도 찾기는 별로 어렵지 않다.
『대권문화가 우리사회 멍들게 한다.』얼마전 국회의장이 점잖은 국내외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했다는 말이다.
『정책지향 정치와는 정반대 개념이며 국민의 안락한 삶과도 거리가 있는 문화』라고 이 문화에 대한 정의까지 그는 내리고 있다. 현란한 우리의 문화적 삶에 또 하나의 새로운 문화가 있음을 그는 확인해준 셈이다.
그뿐 아니다. 또 하나 별난 문화가 우리 눈앞에 다가설 전망이다. 정부가 솔선해 창조해 내겠다는 「건전한 음주 및 놀이 문화」라는 것이다. 대권문화란 말이 창조된지 며칠되지 않아 보건당국에서 「국민들이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업종의 유흥공간」을 마련해 그런 문화를 유도할 방침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또하나의 별난 문화
「우리는 문화민족」이란 의식을 국민학교 문턱에서부터 머리속에 박아준 탓인지 무슨 말에든 문화를 끌어대는 버릇이 있다. 얼핏 생각해볼 수 있는 그런 예는 수두룩하다.
시위문화,자동차문화,행락문화,향락문화,외식문화,군사문화…,그런데 우리의 요즘 통념으로는 그앞에 「건전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안심이 되지,그렇지 않으면 사회의 병리현상쯤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알게 모르게 문화란 말 자체가 부정적인 뜻을 내포하는 접미어처럼 돼버린 느낌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질서가 없고 무절제하고 아귀다툼같은,진정 「문화적」인 것과는 정반대의 의미를 내비치는 말처럼 돼버린 셈이다.
꼬리표처럼 매달려 끌려 다니는 문화란 말을 「전쟁」이란 말로 바꾸어보면 그런 의미는 더욱 분명해 진다. 대권문화와 대권전쟁,자동차문화와 자동차전쟁,행락문화와 행락전쟁… 등 문화와 전쟁이란 말이 동의어처럼 느껴질 정도다.
문화란 말이 인플레 차원을 넘어서 오용의 경지에 까지 이르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문화를 어느 한가지 의미로 똑떨어지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타나는 사회현상을 통틀어 문화라는 말속에 넣어 포괄적으로 사용할 수는 있다.
비문화적인 사회 현상 역시 넓은 의미에서의 문화현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정신인플레도 걱정
그러나 우리가 통념상 추구하는 문화란 그처럼 오용되고 평가절하된 문화가 아니다. 정신을 살찌울 수 있는 상위개념의 문화가 사회의 주조를 이루어야 한다.
새로운 사회현상들은 새로운 말들을 필요로 한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문화란 말의 용도가 그런 기준에서 불가피한 것이라면 우리의 앞날은 참담할 수 밖에 없다.
인플레와 과소비는 경제적인 이유로만 걱정할 일이 아니다. 일상의 말,특히 문화라는 말의 인플레에서 비롯되는 정신의 인플레를 잡는데서부터 사회를 바로잡는 가닥을 잡아 나가야 한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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