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IReport] 매출 1조 ~ 2조 기업을 '국가대표'로 키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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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그러나 이 같은 한국의 처량한(?) 신세는 진작 예견됐던 바다. 3년 전 기자가 하이얼이나 롄샹 등 중국의 일등 기업을 방문 취재할 당시 이들은 이미 "우리는 한국을 경쟁 상대로 생각지 않고 있으며 세계 최고가 목표"라고 호언했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대표선수'끼리의 경쟁에서 한국은 중국에 밀렸다. 미국 포춘지가 매년 선정하는 세계 500대 기업에 들어가는 한국의 기업 수는 지난 10년간 변함이 없었다. 삼성전자와 현대차 등 늘 그 얼굴이다. 기업 수는 11~13개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반면 96년 불과 3개였던 중국 기업은 2005년 무려 20개가 세계 500대 기업에 진입했다. 한국은 본디 '중소기업의 나라'가 아니다. 1960년대 중반 제2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시작했을 때부터 대기업과 수출 위주로 산업을 재편했고, 이를 통해 '한강의 기적'을 낳았다. 스포츠를 엘리트 위주로 운영했듯 경제도 대표선수 위주로 운용했다. 그렇게 키운 대표선수들이 10년째 겨우 10개 남짓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 경제에 고장이 나도 단단히 났다고 봐야 한다.

정작 이보다 더 큰 문제는 10개 남짓한 기업을 제외하면 세계에 내세울 만한 다른 기업이 없다는 점이다. 500대 기업 중 맨 꼴찌인 500등의 매출액을 기준으로 했을 때 해당 기업의 90% 정도 규모를 갖고 있는 한국 기업은 하나도 없다. 수년 내 새로 500대에 들어갈 만한 기업이 전무하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지금 500대 기업에 진입해 있는 업체들이 쇠락한다면 한국의 위상 역시 떨어진다. 글로벌 경쟁이 극심한 요즘 한국의 초일류 기업들이 영원히 500대 기업에 머물러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천하의 소니가 삼성전자에 추월당하고 영원한 자동차 제국이었던 GM이 일본 도요타 자동차에 덜미를 잡히는 세상 아닌가. 사정이 이러하다면 정부는 중소기업 육성이나 보호에 매달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매출액이 1조~2조원 정도인 장차 초일류 기업이 될 만한 잠재력 있는 대기업을 도와야 한다. 뜬금없이 1조~2조원 타령을 하는 이유는 이렇다.

우리나라에서 외부감사를 받는 기업체 수는 1만3000여 개다(금융업 제외). 이들을 매출액 순으로 줄을 세우면 매출액이 많을수록 그에 해당하는 기업 수가 적어진다. 중앙대 황인태 교수가 2005년 자료를 이용해 분석한 바에 따르면 매출액이 500억원 미만인 기업 수는 1만여 개로 가장 많고 이어 매출액이 500억~1000억원인 기업(1400여 개)이 둘째로 많다. 5000억~1조원인 기업 수는 137개로 적어지고 2조원 이상인 기업은 83개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분석을 보다 보면 매출액이 1조~2조원인 기업 수(73개)가 2조원 이상 기업보다 더 적은 기이한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기업 수가 1조~2조원대에서 급격히 줄어드는 구조다. 그러고 보니 최근 성장 신화로 칭송받던 팬택이나 레인콤이 모두 이 벽에 걸렸다. 1조원은 순조롭게 넘었지만 2조원으로 치달리다가 급제동이 걸렸다. 이 고비만 잘 넘기면 이들은 세계 500대 기업으로 순항할 가능성이 높다. 정부가 돕겠다면 이들을 도와야지 별 실효 없는 중소기업 보호론에 애착을 가질 일이 아니다.

김영욱 경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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