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 개발(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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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두만강이 오늘의 한·중 국경선으로 굳혀진 것은 구한말 순종 융희3년(1909년)이었다. 일제가 만주철도 부설권을 얻어내는 대가로 이 강을 조·청국경의 경계로 삼는 양보를 했던 것이다.
소련이 두만강에 한다리 걸치게된 것은 이보다 50년쯤 앞이다. 러시아는 철종 11년(1860년) 북경조약을 체결,청나라로부터 우수리강 동쪽의 연해주 7백리땅을 할양받았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두만강 하류 16.5㎞에서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게 됐고 국방상의 중요 전초기지였던 녹둔도를 잃고 말았다.
간도지역의 중국영토 편입은 두만강과 토문강이 동일한 이름이라는 청나라의 강변에서부터 비롯됐다. 숙종 38년(1712년) 백두산정계비를 세우고 토문강을 국경으로 정했는데 청이 19세기말 토문·도문·두만강은 같은 이름이라고 우겨대면서 「두만강 국경」을 주장했다.
조·청 양국은 1885년 감계담판을 벌였지만 「토문강 국경」과 「두만강 국경」이 팽팽히 맞서 결렬됐고 2년후의 재감도 실패로 끝났다.
두만강의 명칭 유래는 확실치가 않다. 『한청문람』에도 새가 많이 모여드는 골짜기란 뜻의 도문색금에서 색금을 뺀 「도문」이라는 여진어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원나라때 지방관직명인 만호의 여진어 발음 「두맨」이 한자표기로 두만이 됐다는 설이 엇갈리고 있다.
두만강은 선사시대 이래로 한반도 문화형성의 통로 역할을 해왔다. 근대에 와서는 민족수난기의 처연한 서사시 무대로서 또는 고국땅의 마지막 문턱으로 상징화돼 많은 문학예술작품의 배경이 됐다.
민족역사의 짙은 애환이 서린 두만강유역은 비록 자연조건은 좋지 않지만 「무진장의 미개척 삼림자원과 지하자원이 묻혀 있는 개발가능의 잠재력을 가진 「미래의 땅」이다.
지난 15∼21일 평양에서 남북한과 중국·몽골·소련·일본 등 6개국 정부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유엔개발계획(UNDP) 두만강 개발회의는 연내 「두만강개발위」를 설립,94년 4월까지 개발 타당성조사를 마치기로 했다. 두만강개발은 통일대비와도 관련되는 크게 환영할만한 일이다. 다만 주의할 대목이 하나 있다.
개발의 독식을 넘보고 있는 일본의 이른바 「제2대동아경영」 구상과 「환동해경제권」 추진을 결코 간과해선 안된다.<이은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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