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나의 선택 나의 패션 67. 새 물류시스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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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미국 최고급 백화점 중 하나인 삭스 백화점이 1983년 9월 22일자 시카고 트리뷴에 낸 노라 노 광고.

미국 중동부 지역의 삭스 백화점은 서부에서 떠오르고 있던 노르드스트롬 백화점과 함께 유통업계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노르드스트롬은 새로운 경영 방식을 도입해 단기간에 성공했다.

노르드스트롬의 바이어들은 다른 백화점 바이어들보다 더 많은 발품을 들여 신상품을 찾아다녔다. 그 정도 규모와 수준의 백화점이라면 새로운 브랜드와 신상품이 '제 발로' 찾아올 텐데도 그곳 바이어들은 스스로 새 디자이너와 브랜드를 찾아내겠다는 신념으로 노력했다.

노라 노도 노르드스트롬의 한 젊은 바이어의 눈에 띄어 세련되고 신선한 감각의 디자이너들만 입점한 세비라는 코너에 들어가게 됐다.

그 뒤 1980년대 말까지 10년이 넘도록 노라 노 제품은 한 시즌도 빠짐없이 그 코너에 걸려 있었다. 노르드스트롬과 노라 노는 디자인뿐만 아니라 영업 전략도 서로 호흡이 잘 맞았다.

일반적으로 미국 의류업체는 옷 주문을 받으면 석 달 안에 납품했다. 그러나 나는 납품 기한을 한 달 내지 두 달로 단축해 상품이 팔려 나가는 추이를 봐가며 추가 주문이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바꾸었다. 추가 주문품은 한 달 안에 신속하게 보내졌다.

한번은 로스앤젤레스의 조셉 매그닌 백화점이 한꺼번에 3000벌을 주문했다. 나는 뉴욕에 있는 직원들에게 전체 물량을 한 매장에서 판매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지시를 내렸다. 우리 브랜드의 제작 물량은 월 3000벌 정도인데 그것을 한 매장이 독점하면 다른 바이어들은 떠날 테고 결국 우리는 한 바이어에게만 목을 매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월 1000벌씩 나눠 석 달간 주문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의류업계에 '옷 장사는 앞에서 벌어 뒤로 밑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옷 판매상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재고를 떠안는 것이다. 내가 만들어낸 이런 물류시스템은 위험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노르드스트롬 백화점은 이 시스템을 크게 환영했다. 백화점은 판매 실적을 하루 단위로 전산 집계하기 때문에 사흘 안에 판매 추이를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 판매가 부진할 경우 의류업계만큼 매정한 곳도 없다. 요즘에는 '매출이 인격이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내가 미국에서 이런 새로운 시스템으로 영업할 수 있었던 것은 팩스와 항공사의 신속한 수송 덕분이었다. 팩스를 통해 서울로 주문이 들어오면 즉시 내용을 분석해 염색 프린트 공장으로 넘겨 생산을 시작했고, 완성된 제품은 비행기 편으로 곧장 뉴욕으로 보내졌다. 서울과 뉴욕은 시차 때문에 날짜로만 따진다면 같은 날에 도착하는 이점도 있다.

이렇게 단시일에 납품할 수 있는 시스템은 당시 미국에서도 흔하지 않았다.

노라 ·노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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