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 안겨준 여야대표 국회연설|서민과 거리 먼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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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의 심정이란 마치 허방을 짚었을 때처럼 힘이 쑥 빠지는 느낌일 것이다. 13대 국회의 마지막 정기국회가 그러하다. 개원이래 지난 4년간 불신과 오명을 잔뜩 뒤집어 쓴 국회지만 그래도 나는 유종의 미라는 게 있으니 마무리만큼은 국민의 기대에 부응할 줄 믿었었다. 그러나 국정감사가 그랬고 대표연설이 그랬다. 우스갯소리처럼 「혹시나」했더니 「역시나」였다.
역대 국회 중 13대만큼 개혁과 민주라는 시대적 사명이 컸던 국회도 없었다. 그 점은 여야의원 모두 이구동성으로 강조했던 바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13대 국회는 정치에 대한 깊은 불신과 실망만을 남긴 채 끝내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고 그렇게 종막을 내리고 있다.

<내치 전반에 중병>
그런 국회를 향해 새삼스레 뭐라 왈가왈부하겠는가. 하지만 앞날의 사정이 심히 우려되는 터이니 또다시 한마디 고언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경제는 그 몰골이 말씀이 아니다. 수출이 안되고 국제수지 적자가 쌓이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고 있다. 기업은 돈 가뭄에 찌들어가고 근로의욕은 떨어지고 과소비는 진정되지 않고 있다. 하긴 경제뿐 아니고 북방외교를 제외한 내치 전반이 중병을 앓고 있지만 경제가 모든 국정의 버팀목이 된다는 점에서 나는 무엇보다 이 경제위기에 주목해야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바로 「서민의 눈을 가진 정치」가 이 시점에서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 다름 아닌 경제문제이기 때문이다.
요즈음 시장에선 하루가 다르게 물가가 뛰고있다. 어제오늘이 판이하게 마치 고삐 풀린 말과 같이 뛰고있다. 이런 판국에 국회가 딱 부러지게 물가 잡는 대안 한가지만이라도 내놓았다면 13대 마지막 정기국회의 뒷모습이 얼마나 늠름해 보이겠는가.
경제문제에 대해 김영삼 민자당 대표는 전례 없이 많은 언급을 했다. 또 이기택 민주당 공동대표도 경제비상대책 국민회의 구성을 제의하는 등 이를 비중 있게 다루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두 대표의 연설은 「노는 입에 염불 외듯」미사여구를 늘어 놓은 데 불과하다. 김대표는 경제난국을 말하면서 국민이 허리띠를 느슨히 풀어놓은 때문, 공무원이 안일했던 때문, 기업이 의욕을 보여주지 못한 때문, 근로자가 더 이상 근면하지 않은 때문이라고 원인분석을 했다. 일단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게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국민·공무원·기업·근로자들이 잘못한 때문이고 정권 담당자·정책당국자·정치인과는 무관하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내 탓은 없고 국민 탓, 기업 탓, 근로자 탓, 공무원 탓만 해대는 정치인은 그러면 뭘 하는 사람들인가.
이대표의 말도 그렇다. 철학 없고, 일관성 없고, 경제를 정치도구화해서 위기가 왔다고 했다. 따라서 국민회의를 구성해야 하고 노정귄은 남은 임기동안 혼신의 노력을 다하라고 촉구했다.

<선거는 경제와 직결>
그러나 그것은 물가를 잡아야한다는 채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말이라면 이미 국민들이, 언론이 충분히 대변했다. 야당다운 야당이라면 적어도 대안을 제시했어야 한다. 국민회의 구성을 대안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나 경제란 국민회의 같은 중구난방 식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더욱 공소하게 들리는 것은 경제위기와 직결될 내년도 선거에 관한 언급이다. 내년 선거가 만일 금권·타락선거가 될 경우 경제에 미칠 파장이란 가위 위협적이다. 마치 천야만야한 벼랑과 같다. 물론 두 대표는 모두 돈 안 드는 선거를 강조했다. 그리고 그 처방으로 선거법 등 제도개선과 공영제 확대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 부분이 내 귀엔 바로 공염불처럼 들렸다.
두 대표는 현행선거가 과열·금권·타락선거 예방에 무력하므로 13대 국회가 제도적 장치를 못하면 선거망국론이 제기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과연 그렇다. 그러나 역대 타락선거의 주범이 누구였던가. 제도였는가, 그들 자신이었는가. 현행 선거법 어디를 보아도 금권·타락을 조장하는 조항은 없다.
그리고 현역 정치인 누구도 선거법을 지킨 사람은 없을 것이다. 비근한 예로 지난번 집권여당의 광역선거 공천기준부터가 재력이 우선 이었고 역대 선거 현장에서 돈을 뿌려댄 사람은 대다수가 정당 자신이었다. 당원용·당원단합대회 명목의 사전선거운동을 한 장본인도 정당 자신이었다. 선거법 탓도, 선관위 탓도 아니고 그들 탓이었다.
김대표는 하나의 대안으로 선거재판의 6개월 내 완결을 제시했는데 기술적으로 가능할지 여부는 차치하고, 그렇다면 2년6개월째 계류중인 동해 국회의원 재선거 건부터 언급하고 들어갔어야 한다.
물론 돈 안 쓰는 선거는 먼저 제도적 장치로 강구해야 한다. 이에 관해 나는 선거의 완전 공영제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완전 공영제 필수>
아무튼 완전 공영제가 되지 않는 한 돈 안 쓰는 선거는 연목구어에 불과하다. 나의 완전 공영제 주장이 이상론일지는 몰라도 국민의 눈으로 보면 이상론이 아닐 것이다. 내년 경제를 우려하는 시각에서 보아도 돈을 물 쓰듯 쓰는 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경제의 서거가 되고 말 것이다.
두 대표의 국정연설을 듣고 느껴야 했던 나의 실망감이 남은 회기 동안 해소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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