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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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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마리 퀴리가 교수직을 얻은 건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한 지 8년, 그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지 3년이 흐른 뒤였다. 노벨상을 공동 수상한 남편이 소르본대 교수로 임용될 때 그는 조수직에 만족해야 했다. 남편과 사별한 1906년에야 학교는 그 빈자리를 부인에게 내줬다. 당시 과학계는 '대단한 연구를 여자가 주도했을 리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여성 노벨상 수상자가 탄생한 것도 부부 공동 명의의 연구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진 랜드럼, '위대함에 이르는 8가지 열쇠')

똑똑한 여성이라 해도 제대로 대접받은 건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자유 없는 지식 없다'는 학풍이 강해 68년 '68혁명'과 지난해 프랑스 노동개혁 반대 시위의 본거지가 된 소르본대가 100년 전만 해도 이럴 정도였으니 말이다. 마리아 몬테소리는 1896년 이탈리아 최초의 여의사로 기록되기까지 아버지와 대학 총장, 교황청의 만류를 힘겹게 넘어서야 했다. 52년 한국 여성으로 사법시험에 처음 합격한 이태영은 '여자는 이르다'는 당시 권부의 정서에 부닥쳐 법관의 꿈을 접었다. 양성(兩性) 평등의 눈초리가 날로 매서워지는 요즘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일들이다. 대신 여성의 사회활동을 가로막는 교묘한 '유리천장(glass ceiling)'이 흔히 거론된다. 여성들의 고위직 진출을 가로막는 직장 내 보이지 않는 벽을 비유한 표현으로 미 언론이 만들어 80년대부터 유행시켰다.

이런 판에 실력밖에 믿을 게 없다고 여겨서일까. 똑똑한 여학생과 일명 '알파걸'(당찬 커리어 우먼)의 기세가 등등하다. 여학생이 일반적으로 남학생보다 학업 성적이 좋은 건 세계적 추세다. 독일 ZDF 방송의 여성 앵커였던 카트린 뮐러 발데는 '우리 아들이 왜 이웃집 딸보다 공부를 못할까'하는 고민에 자문자답하다 책까지 쓰게 됐다. 여학생의 언어 및 학습 능력이 우월한 데다 현대 교육 시스템이 남학생들에게 불리하다는 결론으로 충격을 줬다. 이런 내용의 '공부 잘하는 여학생, 공부 못하는 남학생'이 2005년 출간돼 여러 나라에서 화제가 됐다.

지난해 국내 의사 면허 취득자 셋 중 한 사람이, 또 지난주 판.검사 임용 인원의 절반 가까이가 여성이었다. 사기업만큼 '유리천장'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공무원.전문직 분야의 약진이 두드러진 걸 보면 한국 여학생들은 공부만 잘하는 게 아니라 영민하기까지 한 것 같다.

홍승일 경제부문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