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뮌헨대 고트프리트 킨더만 교수 특별기고(통일독일 1주년: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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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국통일도 갑자기 올지 모른다/북한주민에 한국실정 전파하는것이 급선무
한국과 독일은 그 문화·역사가 상이하지만 분단과 관련한 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한 유사점이 있다.
독일통일에서 한국의 통일정책 및 전략을 위해 어떠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먼저 지적할 것은 모든 중요사건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최근 소련 쿠데타 실패후 진행되는 「제2혁명」이나 걸프전의 마지막국면처럼 독일 통일도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진행됐다. 이는 한국인들,특히 책임있는 지도자들이 통일에 있어서 「상상할 수 없는」것 까지 포함한 모든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일의 예를 보자. 지난 89년초 동독 독재자 에리히 호네커는 베를린장벽이 앞으로 50년에서 1백년은 건재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바로 그해 호네커는 체포됐고 공산독재는 끝장났으며 브란덴부르크문이 다시 열렸다.
서독은 1949년 건국직후부터 통일을 준비해 왔다. 통일이란 공동헌법의 존재나 창조를 요구한다.
당시 서독 정치지도자들은 기본법(헌법)서문에 『새로운 질서가 과도기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했고,제23조에서는 「독일의 다른 지역」(동독)도 이 기본법에 편입할 수 있도록 규정해 놓았다.
바로 이 조항이 후에 동서독이 헌법적으로 통일을 가능케한 근거가 됐다.
기본법 제23조에 의한 동서의 서독편입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 실각하고 새로운 소련지도자들이 그의 정책을 파기할 가능성을 우려해 신속히 추진됐다.
국제환경도 통일과정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한국과 독일의 분단이 2차 대전 종전후 국제상황에 의해 비롯된 것처럼 국제정치의 급격한 변화가 독일통일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앞으로 한국통일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독일통일정책은 2개의 지정학적 요소,즉 서방정책(베스트 폴리틱)과 동방정책(오스트 폴리틱)으로 구성돼 있었다.
지난 52과 54년 당시 서독의 콘라트 아데나워정부는 서방동맹국들과 독일조약을 체결,「통일독일이 민주헌법을 가지며 유럽공동체(EC)에 가입한」는 공동목표를 위해 노력하자는데 합의했다. 이는 지난해 소련이 「2+4회담」에서 독일통일을 승인하고 통일독일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잔류를 허용하는데 밑거름이 됐다.
70년대초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총리에 의한 동방정책으로 독일의 통일전략은 보충·확대됐다. 72년 동서독간 조약체결로 서독은 동독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했다. 이는 동독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했다. 그후 시작된 수백만명의 인적교류는 독일의 동질성 회복에 크게 기여했다. 이로써 두개의 독일은 유엔에 가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서독이 제각기 유엔에 가입한 것이 그후 통일과정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한국에 매우 중요한 교훈이 될 것이다.
한국의 북방정책은 소련·동유럽과 외교관계 수립은 물론 한·소양국정상의 상호방문등 전례없는 외교적 성공을 거뒀다.
한국이나 서독은 모두 자유시장경제에 기초한 막강한 경제력을 소련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소련의 지지란 독일의 경우 통일을 위한 것이었고,한국의 경우는 한국을 고립시키려는 북한의 외교전략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과 독일의 상황은 다른 점도 많다. 통일전 동독은 서독 언론매체에 의해 광범위하게 개방됐다. 동독주민의 75% 이상이 서독 TV를 시청,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더욱이 지난 72년부터 서독주민들의 동독 자유왕래가 허용됐다. 중국도 지난 87년부터 지금까지 2백만명이상의 대만인들이 본토를 방문했다.
하지만 한국의 사정은 다르다.
북한주민들은 한국 실정을 잘 모르고 있다. 따라서 협상이나 기술적 방법을 통해 북한주민들에게 한국실정을 전파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독일에서는 지난 63년 에곤바르가 이른바 「접촉을 통한 변화」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적대적인 두 체제는 협조적 접촉을 통해 서로 변화하며 서로 유사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그러나 동독과 동유럽의 경우 틀린 것으로 판명됐다. 물론 접촉을 통한 변화는 분명 있었다. 그러나 그 변화는 동독과 동유럽이 일방적으로 시장경제체제와 민주주의로 나아간 것이었다.
경제적으로 서독은 동독을 고립시키지 않았다. 동독이 「외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서독은 동독을 간접적으로 서유럽경제권에 편입시켰다. 통일이전 수년동안 서독은 동독에 막대한 양의 차관을 지원,동서주민간 생활수준차가 심해지는 것을 막았다. 이는 또 동독이 서독의 지원에 의지하도록 함으로써 소련의존을 탈피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북한을 상대하는 한국에도 이같은 정책은 권고할만 하다.
예를 들어 남북간 합작투자나 경제·기술 협력 등이 그것이다.
독일통일과정은 소련이 독일통일에 대한 정책을 바꿀 것을 우려한 나머지 조급하게 진행됐다. 때문에 피할 수 있었던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독일이 저지른 실수를 피하면서 통일의 긍정적인 성과를 연구하는등 통일시나리오를 개발하고 독일통일과정을 면밀분석할 수 있는 전문학자들로 구성된 팀 구성을 한국측에 권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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