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나의 선택 나의 패션 61. 미국 시장 뚫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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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80년대 초 미국의 패션 전문 일간지 WWD에 실었던 필자의 옷 광고. 당시 유행하던 뉴 로맨티시즘을 표현했다.

미국 뉴욕 삭스(Saks) 백화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옷을 더 주문하고 싶다며 가격을 절충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뉴욕에 가서 협의하겠다고 답변했다. 추가 주문량에 따라 값을 결정할 생각이었다.

뉴욕에 도착했다. 백화점 측에서는 부사장, 담당 바이어, 실무자 등 세 명이 참석했다. 나는 멋진 옷을 입고 일류 레스토랑에서 그들을 맞았다. 내가 먼저 실크 프린트의 어려움을 털어놓자 부사장이 웃으면서 "그것은 당신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탈리아 일류 공장에서도 늘 프린트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죠"라고 했다. 그 말은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가격이 맞지 않아 추가 주문은 사양하기로 했다. 내 나름대로 앞으로의 비즈니스를 구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삭스 백화점에서는 내 옷들이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며칠 뒤 미국에서 발행되는 패션 전문 일간지인 WWD(Woman's Wear Daily)에 'The real thing'이라는 제목으로 한국 실크와 프린트를 높이 평가하는 기사가 났다.

1973년 8월 6일자 뉴욕 타임스에는 패션 전문 기자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앞으로는 패션이 어디서 올지 예측하기 어렵다… 내가 삭스 백화점 2층 디자이너 코너에서 멋진 실크 드레스를 발견하고 라벨을 들여다보니 Made in Korea가 씌어 있었다. 너무 놀라 담당 바이어에게 어떻게 이 백화점 최고급 디자이너 코너에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이 걸려 있느냐고 물었더니 파리 기성복 전시회에서 발견했는데 제품이 좋아 주문했다는 것이다. 바이어는 덧붙여 동양에서 오는 옷은 사이즈가 맞지 않아 돌려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노라 노의 옷은 마네킹에 입혀보고 놀랐어요. 품과 길이가 모두 정확하게 들어맞았거든요라고 했다… 패션이 파리나 밀라노.뉴욕에서만 오는 시대는 이미 지나가버렸다. 이제 패션은 어디에서 올지 아무도 모른다'. 뉴욕 타임스 기사를 읽고 나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50년대부터 세계적 패션 감각을 유지하는 데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던 나였다. 서울에 살면서도 최소한 매년 한 번은 파리 컬렉션을 보러 다녔고, 미국을 드나들며 세계 패션시장을 철저히 조사했다.

하와이에서 부티크를 운영할 때 축적한 손님들의 몸 치수를 토대로 미국 여성의 평균 사이즈를 계산해 냈다. 그 덕에 미국 여성의 엉덩이 크기가 세계 표준 체형보다 한 사이즈 정도 크다는 것을 알았다. 몇 년 뒤 미국에서 발표된 '뉴 스탠더드 사이즈'를 보니 내가 만든 통계자료와 거의 들어맞았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닥쳐도 세계무대에서 일할 수 있도록 노력한 결과가 첫 번째 미국 시장 입성에 먹혀들었던 것이다.

노라 ·노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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