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은논술의힘] 이미지로 포장된 '가짜 현실'이 판치는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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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사건(pseudo-event)'이란 단어를 처음 사용해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등재하게 만든 '이미지와 환상'은 미국 역사학자 대니얼 부어스틴(1914~2004)의 대표 저서다.

미국에서 TV나 영화가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던 1962년 초판이 나왔지만 예증이나 이면 분석은 45년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탁월하고 예리하다. 60년대 미국뿐 아니라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일을 비판하는 근거로 유효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가짜 사건이란 매스미디어를 통한 이미지 조작을 가리킨다. 이런 사례는 역사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20세기 초반 유명인의 74%는 정계와 재계, 전문직 종사자였다. 하지만 1920년대 이후 유명인의 절반 이상을 연예인이 차지했고, 순수 예술계 인사의 수는 점차 감소했다. 최근까지 전체 유명인 중 점유 비율이 항상 증가하는 분야는 프로 스포츠계와 연예계라는 사실만 봐도 이미지 조작을 통한 가짜 사건이 얼마나 일상적인 일이 됐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자신도 모르게 외국영화를 패러디한 영화감독을 다룬 영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부어스틴은 이렇게 본말이 전도된 사회의 배후에 이른바 '그래픽 혁명'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1830년대 전신기가 발명되고 통신사가 등장하며 인쇄와 현상 기술이 급격히 발달했다. 따라서 사람과 풍경.사건을 인쇄된 이미지로 만들어 보관.전달.배포하는 기술도 급격히 진보했다. 그 바람에 "미국인은 환상이 현실보다 더 진짜 같은 세상, 이미지가 실체보다 더 위엄을 갖는 세상에 살고 있다. (중략) 우리는 가짜 사건의 모호함을 즐겁고 환상적인 경험으로 여기고 있으며, 인위적인 현실을 사실로 믿음으로써 위안받고 있다"고 분석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진짜 서부 카우보이보다 가짜 존 웨인을 더 멋있는 카우보이로 여기게 됐다"고 개탄한다.

이미지로 포장된 가짜 현실 또는 가짜 사건이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들이 진짜에서 관심이 멀어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진짜 현실이란 우리 삶의 실제 조건을 통해 파생되는 문제들, 예컨대 우리가 어떤 일을 해 돈을 벌고, 무엇을 먹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집을 장만하는가 하는 문제들이다.

그런데 가짜 현실은 정작 중요한 문제 즉, 진짜 현실을 방치하도록 만든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경험을 방해하고 알아야 할 가치 있는 정보를 알지 못하게 한다. 해결해야 할 모순을 망각하게 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문제에 집착하게 만든다.

남의 저작물을 마치 창작한 것처럼 몰래 베끼는 표절 행위 역시 부어스틴이 말하는 '가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표절은 곧 남이 구축해 놓은 좋은 이미지를 슬쩍 훔쳐다 자기 이미지로 바꿔 보려는 파렴치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원본에 대한 아우라(Aura.예술작품에서 흉내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마저 희미해진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표절은 너무나 손쉬운 이미지 조작 방법이 됐다.

작품 속 세상은 비록 이미지와 환상으로 가득하더라도 그것을 창조한 사람의 노력만큼은 진짜 현실인 세상이 그리운 요즘이다.

김기태 교수(세명대.미디어창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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