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 탐하지 않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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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그는 나라의 정사를 돌보는 높은 관직에 올라서도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탕하지 않는 청백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너그러운 성품이 남을 잘 용서하는 버릇이 있어 태석균의 죄를 감해달라고 사헌부에 부탁한 것이 화근이 되어 68세 때인 세종12년 벼슬에서 쫓겨나 쉴 곳을 찾은 곳이 여기 반구정이었다.
큰사람이 높이 지은 정자속세를 끊고 노니는 자취 뚜렷하다
산은 제 모습을 감추려는 듯
안개속으로 들어가고
갈매기는 뜻을 아는듯
물을 차며 날아오는구나
굽이쳐 흐르는 물은
안으로 소리를 내고
저물녘 뜬 구름은
그림자속을 헤맨다
여생을 세속에 맡긴들
무엇을 얻으리오
한가로운 곳을 찾아
함께 떠돌고 싶구려.
황희가 쓴 이 시의 제목은 「이경의 반구대운을 차운한 시」다. 그러고 보면 반구정은 반구대로 불렸던 것 같고 이 정자 또한 황희가 지은 것이 아니고 누군가 세운 것을 빌려썼던 것이 아닌가 싶다.
남원으로 유배갈 때에도 시집들만 들고가 읽었다는 기록이 있는만큼 나이도 칠순가깝고 하니 여기서 눌러 쉬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반구정에 온지 1년도 못되어 세종은 황희에게 영의정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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