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복귀까진 “머나먼 여정”(리투아니아공 현지르포: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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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곳곳에 「비효율성」도 사려/텅텅빈 호텔서도 “방없다”고 퇴짜
발트해 3국을 가리켜 사람들은 흔히 「소련의 서구」라고 불러왔다. 또 과거 제정러시아때는 「유럽을 향한 창」으로도 일컬어져 왔다.
이제 명실상부한 정치적 독립을 되찾은 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 발트해 3국은 과연 서유럽으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인가.
기자가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리투아니아를 둘러보고 내린 결론은 아직 요원하다는 것이다.
지난 50여년간 소련의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남긴 악폐가 곳곳에 너무나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빌니우스에 도착,호텔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 병폐는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빌니우스에서 가장 낫다는 리투바호텔의 객실담당자는 사회주의의 비효율성이 온몸에 가득차 있었다.
『예약없이 왔는데 방을 구할 수 있느냐』고 묻자 『전혀 없다』는 퉁명스런 대답이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예약못한 사정을 설명하며 아무리 사정해도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시내의 다른 호텔을 소개할 수 있느냐』니까 『그건 내소관이 아니다』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배인이란 사람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빈방은 많이 있다』는게 그의 대답이었다. 『그런데 왜 객실 담당자가 방이 없다고 하느냐』고 따져 물으니 『좀 피곤했던 모양』이라면서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다.
평소땐 20∼30%밖에 방이 차지 않는데 요즘은 세계 각국에서 온 기자들 때문에 60%정도 방이 차 업무량이 평소보다 많아지니까 짜증이 났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뿐아니라 시내 어느 상점엘 가도 손님에게 물건을 팔려는 노력은 찾아볼 수 없다. 살테면 사고 말테면 말라는 식이다.
이래가지고 어떻게 서구자본주의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할 수 있겠느냐고 어렵사리 만난 바그네리우스 리투아니아재무장관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지금 우리에게서 서구식 서비스를 기대한다는 것은 그자체가 무리다.
50년간 몸에 밴 습관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 있겠는가.』
『그래도 발트해3국은 소련 다른 지역과는 좀 다르리라 기대했는데….』
『물론 다른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잠재적 자질이 다르다는 것이지 습관과 제도는 어쩔 수 없지 않는가. 어떻게하면 그 자질을 하루빨리 계발하느냐가 문제다.
그러나 시장경제화와 사유화가 본격 도입되면 소련내 어느 곳보다도 빨리 변할 것으로 확신한다.』
바그네리우스 장관은 리투아니아엔 이미 사유화가 초보적으로 시행돼 소규모 개인상점이나 자영업이 허용되고 있고 외국인과의 합작투자도 적극 장려되고 있다고 말하고,자체화폐인 리타스가 도입되면 시장경제화가 가속화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리타스화 도입은 리투아니아독립의 경제적 상징이 될 것이다. 우리가 루블화를 쓰는 한 우리는 소련경제에 예속되는 것이고 소련경제의 파탄에 동참하는 꼴이 된다.』
리투아니아정부는 지난 7월부터 재무장관의 이름을 딴 「바그노르코스」란 새로운 물품권을 도입,유통시키고 있다.
리투아니인들은 월급의 절반씩을 이 물품권과 루불화로 나눠 지급받고 있으며,바그노르코스는 비록 초보적이지만 자체통화로서 구실을 하고 있다.
일부 상점의 경우 물건을 팔때 바그노르코스만 요구,루블화를 내면 4배값을 받고 있어 바그노르코스는 시간이 흐를수록 루블화를 시장에서 몰아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앞으로 소련과 채권·채무협상이 마무리되고 과거 소련에 합병되기전 서방은행에 맡겨 놓았던 금괴를 되찾아 통화신용도를 확보하면 금년말까지는 리타스화를 태환권으로 유통시킬 수 있다는 것이 리투아니아관리들의 전망이다.
리투아니아는 합병되기 전 미·영·프랑스·스웨덴 중앙은행에 4.5t의 금괴를 맡겨 놓았으며,이미 프랑스·영국은 반환을 약속한 바 있다.
발트해3국 전체로 볼때 경제적 측면에서 강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발트해를 끼고 있는 입지조건은 유럽,특히 북유럽과 교역창구가 될 수 있으며 전자·전기등 하이테크분야에서는 소연방내에서 가장 발달해 있다.
라트비아에서 생산되는 TV는 소련내 전체수요의 30%를 공급해왔고 사무기기의 경우 소련제품의 거의 대부분이 발트해3국에서 생산돼 왔다. 특히 수산업이 발달,소련전체수산업의 30%가 발트해3국내 항구를 근거로 이뤄져 왔다.
그러나 아직 서구적 기준에서 보자면 공산품의 품질은 조잡함을 면치 못하고 있어 소련으로부터 수요가 끊어질 경우 서유럽은 고사하고소련·동유럽에조차 수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천연자원이 거의 없는 것도 큰 문제다. 원유의 95%를 소련에 의존하고 있는데 만일 앞으로 소련이 경화결제를 요구해올 경우 치명적 타격이 예상되고 있다.
발트해3국은 경제적 자립을 위해 서방의 경제지원과 서방기업의 대규모 투자에 목을 걸고 있는 형편이다. 발트해3국 전체에 연간 20억∼30억달러의 경제원조가 당장 필요하다는게 이들의 계산이다.
발트해3국이 그토록 바라던 정치적 독립은 이제 쟁취했지만 이들 앞에 가로 놓여 있는 경제적 현실은 냉엄하기만 하다.<빌니우스=배명복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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