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나의 선택 나의 패션 58. 목화 아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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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69년 서울 창경원(현 창경궁) 수정궁에서 열린 패션쇼에서 그해 미국 목화 아가씨로 뽑힌 케이티 머헤드가 한복 모델로 나섰다.

미국은 매년 '목화 아가씨(Miss Cotton)'를 선발해 면직물 판매 촉진을 위한 각종 홍보 활동을 펼치고 있다. 1969년 미국면직협회는 한국면직협회와 공동으로 한국에서 대대적인 면직물 홍보 활동 계획을 세웠다. 미국면직협회는 우선 그해 목화 아가씨와 의상 10여 벌을 한국으로 보내 패션쇼를 열기로 했다. 한국면직협회는 내게 그 패션쇼를 맡아 달라고 요청해왔다. 대규모 패션쇼를 하려면 체계적인 인력 운영이 필수적이다. 마침 YWCA가 건물 신축을 위해 모금을 하고 있었다. 나는 패션쇼 수익금을 기부하는 조건으로 YWCA에 행사 진행 인력을 요청했다. 미리 면직협회 동의도 받아 놓았다.

국내 면직물 산업은 내가 56년 첫 패션쇼를 열기 위해 국산 모직물을 고를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대부분의 직물회사들이 수출을 하고 있었으며, 기업인들도 열린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 나는 면직물 공장 10곳을 다니며 제품의 시장성을 검토한 뒤 각 회사의 주요 제품을 소재로 채택했다. 한편으로는 코튼쇼 홍보를 겸해 모델도 뽑았다. 목화 아가씨가 출연한 패션쇼를 계기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직업 패션모델이 탄생했다.

이 대회에서 1등으로 당선된 모델이 나중에 모델로 널리 이름을 날린 변자영씨다. 그녀는 지금까지 보아 온 전형적인 한국형 미인들과는 크게 달랐다. '퍼니 페이스(funny face)'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독특한 생김새에 늘씬한 몸매을 갖춘 새로운 감각의 미인이었다. 당시 패션계가 원하는 모델형에 딱 들어맞았다.

이 쇼를 준비하면서 가장 나를 흥분시킨 것은 일신방직 공장에서 데님 원단을 발견한 일이다. 막 나온 데님 원단 샘플을 본 나는 너무나 반가웠다. 데님은 앞으로 면직물에서 제일 중요한 소재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미국에서 시작된 데님 패션은 이미 전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수출은 물론 내수시장에서도 소비량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기대되는 품목이었다. 나는 공장 측과 상의해 색상을 약간 바꾸고 가공을 다시 해 보다 효용성이 있는 원단으로 개량했다. 나는 더욱 열심히 데님 패션 디자인을 개발했다.

옷을 만들고 모델들에게 걸음걸이 등을 가르치면서 쇼 준비를 끝냈다. 적극적인 홍보를 위해 당시 인기 절정에 있던 펄 시스터즈가 모델로 특별 출연을 했고, 윤복희씨가 대미를 장식했다. 71년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렸던 두 번째 쇼에서는 무대와 관람석 사이가 꽤 떨어져 우리나라 패션쇼 사상 처음으로 무대 양쪽에 대형 스크린를 설치했다. 그해 나는 방직협회에서 '코튼 개발 공로상'을, YWCA에서는 감사장을 받았다.

노라 ·노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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