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서울 창경원(현 창경궁) 수정궁에서 열린 패션쇼에서 그해 미국 목화 아가씨로 뽑힌 케이티 머헤드가 한복 모델로 나섰다.
국내 면직물 산업은 내가 56년 첫 패션쇼를 열기 위해 국산 모직물을 고를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대부분의 직물회사들이 수출을 하고 있었으며, 기업인들도 열린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 나는 면직물 공장 10곳을 다니며 제품의 시장성을 검토한 뒤 각 회사의 주요 제품을 소재로 채택했다. 한편으로는 코튼쇼 홍보를 겸해 모델도 뽑았다. 목화 아가씨가 출연한 패션쇼를 계기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직업 패션모델이 탄생했다.
이 대회에서 1등으로 당선된 모델이 나중에 모델로 널리 이름을 날린 변자영씨다. 그녀는 지금까지 보아 온 전형적인 한국형 미인들과는 크게 달랐다. '퍼니 페이스(funny face)'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독특한 생김새에 늘씬한 몸매을 갖춘 새로운 감각의 미인이었다. 당시 패션계가 원하는 모델형에 딱 들어맞았다.
이 쇼를 준비하면서 가장 나를 흥분시킨 것은 일신방직 공장에서 데님 원단을 발견한 일이다. 막 나온 데님 원단 샘플을 본 나는 너무나 반가웠다. 데님은 앞으로 면직물에서 제일 중요한 소재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미국에서 시작된 데님 패션은 이미 전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수출은 물론 내수시장에서도 소비량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기대되는 품목이었다. 나는 공장 측과 상의해 색상을 약간 바꾸고 가공을 다시 해 보다 효용성이 있는 원단으로 개량했다. 나는 더욱 열심히 데님 패션 디자인을 개발했다.
옷을 만들고 모델들에게 걸음걸이 등을 가르치면서 쇼 준비를 끝냈다. 적극적인 홍보를 위해 당시 인기 절정에 있던 펄 시스터즈가 모델로 특별 출연을 했고, 윤복희씨가 대미를 장식했다. 71년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렸던 두 번째 쇼에서는 무대와 관람석 사이가 꽤 떨어져 우리나라 패션쇼 사상 처음으로 무대 양쪽에 대형 스크린를 설치했다. 그해 나는 방직협회에서 '코튼 개발 공로상'을, YWCA에서는 감사장을 받았다.
노라 ·노 (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