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 프로이트와 융이 겨루는 '살인 분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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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살인의 해석 원제 : The Interpretation of Murder

제드 러벤펠드 지음, 박현주 옮김, 비채, 556쪽, 1만3000원

20세기 초 미국 뉴욕, 초특급 상류층들이 거주하는 최신식 고층 아파트. 아파트 입주자인 미모의 여인이 온몸에 채찍질 자국을 남긴 채 숨진다. 아파트 건축주 조지 밴웰은 맥클레렌 시장의 권력을 등에 업은 유력 인사다. 살인사건이 밖으로 새나가면 안 된다는 시장의 지시를 받은 휴겔 검시관이 순진한 형사 리틀모어를 데리고 조사를 맡는다. 그러나 부검을 하기도 전에 시신이 사라진다. 얼마 뒤, 열일곱 난 소녀 노라 액튼 양이 집안에서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피해를 입는다. 그녀는 간신히 죽음은 면했지만 충격으로 말과 기억을 잃는데….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추리물의 구조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실상은 완전히 다르다. 1900년대 초 미국을 방문한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와 융이 이 사건에 개입한다는 가정 아래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마침 살인사건이 일어난 직후, 프로이트 일행은 클라크 대학의 홀 학장에게 초청받아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 기념 강연을 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다. 프로이트의 지지자인 영거 박사는 프로이트의 지도 아래 실어증과 기억상실증에 걸린 노라양의 정신분석을 맡으며 사건의 진실에 다가간다.

동시에 프로이트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가 은밀히 진행된다. 정신분석학의 불모지였던 미국의 신경학자들은 프로이트의 사상을 '금욕적인 사람은 항문으로 섹스하길 원한다'거나 '자기 엄마를 범하고 싶은 남자 아이 이야기'라며 폄하했다. 당시 미국 여성들 사이에선 값비싼 전기 신경 치료가 유행이었다. 그 수익을 정신분석에 뺏길 순 없었던 것이다. 프로이트를 격렬히 반대한 학자들의 모임인 '삼두회'는 프로이트가 클라크 대학 강단에 서지 못하도록 음모를 꾸민다. 융이 그들과 연합해 스승 프로이트를 배반하면서 갈등은 정점으로 치닫는다.

지은이는 이 책이 전적으로 허구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배경과 등장인물 등은 철저할 정도로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실제 1909년 8월 29일 프로이트는 융과 어니스트 존스, 에이브러험 브릴 등의 제자를 데리고 미국 땅을 밟는다. 프로이트와 융이 결별한 것도 사실이다. 다만 미국에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감정이 쌓인 1912년 즈음의 일이란다. 소설에서 프로이트는 요실금으로 고생한다. 그 정황은 융이 1951년 폭로한 내용을 바탕으로 설정했단다. 바지에 오줌을 지리는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이 포함되긴 했지만, 프로이트는 적어도 인격적으로는 훌륭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반면 융은 여성편력이 심하고 환각 증세를 앓는 데다 인격적으로도 한참 모자란 캐릭터로 표현된다. 그렇다고 해서 지은이가 프로이트의 학설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 건 아니다. 지은이는 가상의 인물인 주인공 영거를 통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새롭게 해석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죽느냐 사느냐'로 알려진 햄릿의 유명한 대사 'to be or not to be'를 정신분석학적인 틀을 통해 '그대로 있을 것이냐, 아니면 그렇게 보일 것이냐(to be or to seem)'로 해석한 지은이의 시각도 흥미롭다.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정신분석학의 큰 줄기를 훑어주는 건 이 소설의 큰 매력이다.

추리 소설로서 갖춰야 할 덕목도 놓치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반전을 통해 소설의 마지막 부분까지 읽어야만 전체 그림이 보이도록 해놨으니까. 추리력이 뛰어난 독자라면 혹 읽던 도중 알아맞힐지도 모르겠지만.

지은이는 열렬한 문학 청년이자 심리학에 조예가 깊은 예일대 법과대학원 교수다. 대학 졸업 논문으로 프로이트를 택했고, 줄리어드 연극원에서 셰익스피어를 전공하기도 했다. 그런 다양한 경력이 이렇게 지적인 추리물을 쓰게 한 모양이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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