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말 청와대는 정책 쏟아내고 갈라진 여당은 입법 '나 몰라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1면

6일 저녁 정부 과천청사 건설교통부 정책홍보관리실장실. 이재영 실장은 주택법 개정안이 가까스로 국회 사무처에 접수됐다는 현장 직원의 보고를 받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즉시 이용섭 장관과 이춘희 차관에게 보고했다. "공무원 생활 20여 년 동안 지난 1주일만큼 마음 졸인 적이 드물다." 이 실장은 한숨을 쉬었다.

주택법 개정안은 1.11 부동산 대책의 골간인 분양가 상한제와 분양원가 공개 확대를 담고 있다. 만약 이날 저녁까지 개정안이 국회에 접수되지 않았다면 1.11 대책은 자칫 기약도 없이 표류할 판이었다.

<관계기사 6면< b>,E1면>

건교부는 불과 한 달 전 발표한 정책의 후속 입법에 몸이 달았다. 당정 협의에서 분양가 상한제 확대 실시를 9월로 못 박았기 때문이었다. 일정을 맞추자면 2월 임시국회에서 법률 개정을 마무리하라는 청와대의 지시도 외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정부 입법으로 상정하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법제처 심사, 규제 심사에만 수개월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런 절차를 건너뛰려면 의원 입법밖에 없었다. 대책이 나오자마자 이 실장 등 간부 3~4명은 '총대'를 메줄 국회의원 물색에 나섰다. 그러나 믿었던 열린우리당 의원들마저 반응은 싸늘했다.

"분양원가 공개에 찬성할 수 없다"거나 "부동산 대책의 부담을 왜 나보고 지라는 거냐"며 얼굴을 돌렸다. 건교위 소속 12명의 여당 의원 중 6명은 이미 탈당 의사를 밝혀 말도 못 붙였다. 건교부는 거듭 퇴짜를 맞은 끝에 가까스로 열린우리당 문학진 의원의 승낙을 받아냈다. 지난달 30일이었다. 하지만 산 넘어 산이었다. 의원 입법을 하려면 문 의원을 포함해 10명 이상 의원의 연대서명이 더 필요했다. 국회 건교위(21일 예정)에 개정안을 올리려면 15일 전에 국회에 개정안을 접수시켜야 한다. 남은 시간은 고작 1주일뿐이었다.

일대일 설득 작업이 다시 시작됐다. 의원 30여 명을 일일이 붙들고 도장을 찍어 달라고 간청했다. 앞장선 문 의원 보좌관들까지 총동원됐다. 겨우 11명의 의원을 확보한 게 6일 저녁이었다.

임대주택법도 마찬가지다. 건교부의 또 다른 직원들은 비슷한 시각 1.31 부동산 대책을 반영한 임대주택법 개정안을 들고 허겁지겁 국회로 달려갔다. 마감 직전인 오후 6시에야 힘겹게 법안을 접수했다. 임대주택법 개정안은 애초 열린우리당 정성호 의원이 발의했다. 그러나 1.31 대책이 발표되는 바람에 내용을 보완해 다시 상정해야 했다. 이 와중에 정 의원이 탈당하는 바람에 건교부로선 입장이 난처했지만 다른 의원을 찾을 틈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법안들은 상정됐지만 그래도 건교부 간부들은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다. 제1당이 한나라당으로 바뀐 지금의 국회 분위기로는 주택법이나 임대주택법 개정안이 통과될지 장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남은 1년… 끝까지 최선을 다해 마지막 날까지 하는 게 도리"라고 한 뒤 각종 코드 정책과 장기 비전이 쏟아지고 있다. "입법을 뒷받침하라"는 청와대의 지시에 공무원들만 바쁘다. 의원 입법이란 묘수까지 궁리해낼 정도다. 그러나 정치권 사정이 너무 복잡하다. 과천 관가의 한 간부는 "올 한 해는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신세를 면하기 어렵겠다"고 말했다.

여의도를 헤매는 것은 재정경제부와 공정거래위원회 간부도 마찬가지다. 이번 국회에서 출자총액제 개편안을 담은 공정거래법, 4대 보험 통합 징수법, 자본시장 통합법 등 핵심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 그러나 의원 설득에 나선 간부들은 "(의원들이 정치 모임에 정신이 팔려) 약속 시간조차 잡기 어렵다"며 허탈한 표정이다.

게다가 올 들어 법 개정조차 불투명한 장기 비전들이 1주일 단위로 발표되고 있다. '인적자원 활용 2+5(2년 일찍 취직하고 5년 늦게 퇴직) 전략'이 나온 이틀 뒤 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2단계 국가 균형발전 정책'이 공개됐다. 이달 하순께는 '비전 2030'의 산업판인 '산업비전 2030'이 발표된다.

과천 경제부처의 한 관계자는 "레임덕을 막으려고 임기 말마다 거창한 장밋빛 구상을 내놓지만 다음 정부가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한번도 못 봤다"며 "1년 뒤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일을 밤샘까지 해가며 하자니 일이 손에 안 잡힌다"고 푸념했다. 6일 과천청사의 하루는 길고 길었다.

정경민.김준현.윤창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