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권씨의『산정묘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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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세상 살아가는 그 어떤 것에 진정한 가치가 내재되어있는 것일까. 나날이 세속화되는 삶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볼 틈을 잃고 지내다 보면 우리는 우리가 진정으로 지향해 나가야 할 참다운 삶의 길을 망각해 버린다.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이 무한생산-무한소비의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자기 욕망의 끝없는 충족이라는 속된 목표에 빠져버리기 십상이다. 그런데 그때의 욕망이란 제아무리 풍요와 쾌락을 안겨 주어도 끝없이 되풀이되는 거지놀음과 흡사하다.
조정권 시집 『산정묘지』는 인간이 가장 성실하게, 그리고 궁극적으로 추구해 나가야 할「정신」의 가치를 일깨워 주는 의연한 시집이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현실적 가치 체계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 인간의 정신이야말로 이 세상의 타락한 삶을 질적으로 고양시킬 수 있는 위대한 힘이라는 믿음등 이 시집에는 우리 시의 정신주의의 한 전범을 보여줄 사상과 실재가 적절히 녹아 있다. 시인은「산정묘지」연작시 30편을 축으로 한 이 시집을 통해 어느덧 우리 시단의 큰 흐름으로 자리잡은 민중주의적 시류나 세태적·일상적 시류로부터 멀리 벗어나는 목소리로「육신이란 헌 누더기」라고 소리친다. 태어나서 자라온 도회속의 우리들은 모두「바람속을 뛰어가는 촛불」과 같이 위태로운 존재일 뿐이므로 오직 우리의 혼, 우리의 정신을 붙잡아 우리를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위대한 정신이여 오라. 영혼 속으로 방문하라」고 「정신」에의 갈구를 강력히 드러내 보인다.
이때 이 시집의 표제로 내세워진「산정묘지」는 육신을 벗어 던지고 영혼을 껴안을 때까지 그 정신적 지향의 위대한 성취의 순간을 가리키는 상징어가 된다. 거듭 육신의 삶이 질타되고 영혼의 회복이 찬양되면서 이 연작시들은 그 극점을 향해 치닫는 숨가쁘면서 확신에 찬 노래를 이루어간다. 그 노래는「수백년간 해류식물 사이를 흐르는」자연 친화의 과정을 거치며 무수한 자연 세계의 언어들로 풍성해지는 한편「환희의 절정에서 도리치는 세계의 침묵이여」의 노장적 무의 사상을 포착하는 깨침의 순간을 담아 시의 정신적 강인함을 견지해 나간다.
「구름 낀 암석과 조용한 무덤들 사이 밤이 오고 있다」와 같은 자연의 현상과 신화적 이미지가 어우러지는 시어의 풍요로움이 지나쳐 다소 산만해지려는 순간에도「갈가마귀 울음 자옥이 잦아드는 언 하늘에 온통 시퍼런 청죽을…」의 강인한 정신성이 개입되면서 다시금 탄력을 되찾는 은밀한 시적 관계 항들이 시종 그 노래를 떠받친다.
이 시집의 더욱 중요한 대목은「산정묘지」가 상징하는 바「정신주의」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이 정신주의는 첫째, 이 혼탁한 세상에서 홀로 일탈한 신격화된 시인의 것이므로 다분히 낭만주의적인 것이며 둘째, 동서고금의 철인과 현자들의 가르침을 엿들어 현재를 인류문학사적 차원에서 해결하고 있는 인문주의적인 것이며 셋째,「칼을 입에 물고 노래하는 가인」을 앞세우는 지고한 예술가 정신과 관련되어있다.
무엇보다도「모든 노래는 기억되기 위해 잊혀진다」는 무의 절대가치를 지향하는 노장사상의 후예라는 것이다.「무」의 정신성으로 혼돈세상을 질타하는 이 고고한 목소리에 귀기울여 봄직하지 않은가.
박덕규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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