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반자시대(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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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동반자시대」라는 말은 원래 싱가포르의 이광휘 전 총리가 처음 사용했다. 오늘의 세계정치무대엔 공동의 적도 없고,진정한 우방도 없으며,오직 동반자(파트너십)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요즘 모스크바의 미소 정상회담에서 두나라 정상은 입을 모아 냉전시대의 종언과 함께 「동반자시대」의 개막을 알리고 있다. 고르바초프는 『미국과 소련은 서로 적이라기보다 동반자로서 함께 일해나가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맞고 있다』고 했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들자』는 말로 고르바초프와 화문화답했다.
구약성경 이사야서에 나오는 구절이다. 유데아의 헤지카이어왕과 앗시리아의 서내커립왕은 기원전 7백50년에 평화협정을 맺으며 그런 말을 남겼다. 세상의 모든 칼을 부숴 보습을 만들고,창은 낫을 만들자는 것이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공산주의 봉쇄정책을 발표하면서 냉전시대를 포고한 것은 1947년의 일이었다. 그후 미소 두나라는 소련의 베를린 봉쇄,쿠바사태 등을 둘러싸고 전쟁일보전의 상황까지 경험했다.
그런 아슬아슬한 곡절들을 겪으며 두 나라는 1963년 워싱턴과 모스크바사이에 비상전화(핫라인)를 놓았다. 여차한 일이 벌어지면 서로 긴급전화를 통해 방아쇠를 당기는 일만은 막아보자는 뜻이었다. 어이없는 전쟁으로 공멸하기보다는 공생하자는 공존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후 공존과 데탕트(화해)의 논리위에 두나라는 전쟁도,평화도 아닌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이 결정적으로 위기관리에 손발을 맞춘 것은 최근의 이라크전쟁에서였다. 고르바초프는 그때 정말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유엔에서 미국의 입장을 두둔하는 일에 손을 들어주었다.
이제 두나라는 무한소모의 군비경쟁과 이념대결로는 승부를 가릴 수 없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평화도,번영도 없는 가난밖에 보장해준 것이 없는 사회주의는 분명 몰락하고 있으며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승승장구,승리의 노래만 부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두 강대국은 동반자의 관계로 한숨 돌리고 각기 새로운 길을 떠나려 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그것을 「새로운 세계질서」라는 말로 표현했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하나도 새롭지 않은 한반도의 현실앞에 그저 답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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