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성폭력’, 양심에만 맡겨라?

중앙일보

입력

환자를 관리하고 보호해야 할 의사들 가운데 일부가 오히려 환자를 상대로 성폭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지만, 정부와 의료계 모두 의사를 상대로 한 근절 대책이 극히 미흡한 상황이다.

최근 한국성폭력상담소(소장 이미경)가 발표한‘2006년 성폭력상담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접수한 2468건 중 1935건(83.5%)이 주변 사람, 즉 안면이 있는 사람에 의한 성폭행인 것으로 나타났다.

성폭력 가해자 가운데 직장 동료 527건(16.4%), 친ㆍ인척 360건(11.2%), 학교·학원의 교사나 학생 235건(10.4%), 그밖에 친구 등 친분이 있는 사람 182건(5.7%) 등 순이었다.

특히‘사회적 신망과 존경을 받는’직업 종사자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상담 건수가 전체의 10% 가까이 나타났고, 이 가운데 ‘의사 등 의료기관 종사자’에 의한 성폭력 건수도 51건(2.2%)으로 드러났다.

상담소 관계자는 “의사들에 의한 성폭력 피해 사례가 희소하기는 하지만, 환자를 보호하고 치료해야 할 이들이 정작 환자를 상대로 성폭행을 한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라고 지적했다.

의사에 의한 성폭력 상담사례 가운데 특히 경악을 금할 수 없는 것은 강간 등의 성폭행을 당한 후 상담치료차 방문한 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상대로 성폭행을 한 경우.

또한 의사나 한의사가 환자를 진료를 할 때 필요 이상의 스킨십을 하거나, 청진기 진찰 시 일부러 옷을 벗도록 하는 한편 환자를 상대로 모욕적인 성적 농담을 건네는 등 성희롱 피해 사례도 적지 않았다.

상담소 관계자는 “치료를 받기 위해 의사를 찾았다가 오히려 성폭행을 당할 경우 환자의 정신적 충격은 더욱 심각해진다”며 “의사들의 성폭력 발생 건수가 연간 50건 안팎으로 그 절대적 사례는 미미하지만, 사회적 파장이 크다는 점에서 의사들의 윤리의식 재고와 정부와 의료계 모두의 근절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이처럼 의사들의 성폭력 사례가 왕왕 발생하고 있지만, 정작 정부와 의료계 모두 성폭력 근절을 위한 대책 마련은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가족부 관계자에 따르면 “환자를 대상으로 성폭력을 행하는 일부 의사들로 인해 모든 의사들이 잠재적 가해자로 보고 정부가 모든 의사들을 상대로 규제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올해 안에 18세 미만 청소년의 성폭력 피해사례‘신고의무’를 가진 교사·의사 등을 대상으로 성폭력 피해를 인지했을 때 대처요령을 담은 ‘매뉴얼’을 제작, 해당기관에 일괄 배포할 것”이라며 “전 의료인이 성폭력피해 ‘신고의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매뉴얼은 모든 의료기관에 배포되면 의료인의 성폭력 행위도 다소 근절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성폭력범죄의처벌 및 피해자보호등에 관한 법률' 제22조의 5에 의거, 18세 미만인 자를 치료하는 의사 등 의료기관 종사자는 자신이 보호하거나 치료하는 이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알게 된 경우 즉시 수사기관에 신고해야 하는‘신고의무제’가 있다. 이를 위반할 경우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에 처해진다.

그러나 해당 법률상 신고의무는 18세 미만의 성폭력 피해자의 경우에만 해당돼 성인 여성 등을 주 대상으로 하는 의료기관에는 실질적인 규제가 될 수 없는 데다, 배포 예정인 여성가족부 성폭력 매뉴얼 역시 신고의무 직종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인지 시 대처요령을 주로 하고 있어 실질적 근절대책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여성가족부 관계자는“18세 미만이라는 대상의 제한이 있지만, 해당 매뉴얼이 모든 의료기관에 배포되는 만큼 성폭력 근절에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도 “대다수 의사들이 성폭력으로 인한 환자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윤리의식 재고를 당부했다.

한편 의료계 역시 의사에 의한 성폭력 피해 사례가 극히 미미하다는 점으로 인해, 의사들의 양심에만 맡기고 있을 뿐 실질적인 근절대책은 미흡한 실정이다.

의협의 한 관계자는“의사들이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스킨십이 있을 수 있는데 이를 성폭력으로 파악할 지 여부는 사실상 환자의 진술에만 의존해야 돼 무죄인지, 유죄인지를 입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며 “의사들의 양심에 맡기는 것이 성폭력 근절을 위한 최선의 방책 아니겠냐”고 밝혔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성폭력이라는 사안은 의사로서 용납될 수 없는 파렴치한 행위에 해당되는 만큼, 의협의 중앙윤리위원회 차원에서도 3년 이하의 회원 권한정지를 비롯해 고발 및 행정처분 의뢰 등 가능한 모든 제재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메디컬투데이/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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