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으로 가는 몇가지 조건/박세일(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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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나라가 과연 선진국이 될 수 있을까. 우리국민이 과연 선진국 국민이 될 수 있을까. 우리민족이 다가오는 동북아시대·태평양시대에 이 지역의 주인노릇을 제대로 해 낼 수 있을까. 앞으로 10년안에 이들 문제에 대한 결론이 날 것이다.
그런데 선진경제에의 진입여부는 한마디로 우리사회가 앞으로 근로철학과 직업윤리를 제대로 세울 수 있는가,없는가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선진경제에의 진입여부는 기술과 숙련의 선진화·개성화·국제화에 달렸고 이들 기술진보다 숙련축적은 근면과 정직의 노동철학,프로정신과 성실성을 존중하는 직업윤리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힘든 일 기피풍조 만연
한데 최근 수년간 우리는 우리사회의 근로윤리가 해체되는 현실을 경험하고 있다. 공장에서는 불량율이 크게 늘고 수출품하자에 대한 해외로부터의 클레임이 증가하고있다. 투기와 과소비,그리고 생산직 기피의 풍조가 팽배하고 있으며 제조업에서 손을 떼는 기업인들도 늘어나고 있다. 절대빈곤에서 벗어난지 얼마되지도 않은 우리사회에 왜 벌써부터 이런 망국적 증후군이 나타나는가.
그 원인을 깊이 생각해 보건대,이는 우리사회가 그동안 올바른 노동관과 건전한 직업관을 세워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사회는 노동속에서 긍정적 가치와 적극적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고,노동은 아직도 보람이라기 보다는 고통으로 이해되고 있다. 직업도 단순한 생계의 수단,출세의 방편이지,자기완성과 사회봉사의 길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정직의 노동철학도,소명의 프로정신도,혁신의 기업가정신도 아직은 이땅위에 충분히 정착·개화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기술입국이 가능할까. 그리고 대일 기술종속과 대미 시장의존을 벗어나 선진경제를 이루어낼 수 있을까. 그러면 이 사회에 올바른 노동관과 직업관을 세우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첫째,우선 불로소득과 부당이득의 발생기회를 원천적으로 제거하고,전문가와 「힘든 일하는 사람」들을 우대하는 사회적 보상체계를 수립해야 한다.
일하지 않는 자들에게 고소득이 발생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어렵게 살아야 하는 불공정한 사회경제질서를 이대로 두고는 결코 건전한 근로윤리를 세워 나갈 수 없다. 따라서 부동산투기,독과점 이윤,특혜적 소득 등은 철저히 발본색원해야 한다. 또한 생산직이냐 사무직이냐의 직종,대졸이냐 고졸이냐의 학력등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문성과 숙련의 정도,프로정신의 유무에 따라 임금격차가 결정돼야 한다. 힘든 일 하는 사람들에 대한 금전적 보상뿐 아니라 정신적·심리적 보상과 사회적 예우도 달라져야 한다. 그래야 노동을 신성시하는 노동관,장인정신의 직업관이 생길 수 있다.
○투기는 뿌리째 뽑아야
둘째,노동의 상품성을 극복하고 노동의 인간화를 진전시켜야 한다. 고통으로서의 노동이라는 부정적 노동관은 우리사회에서의 일의 내용과 노동환경이 아직도 전근대적이고 비합리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발생한다. 예컨대 일의 내용이 직무를 과도하게 세분,근로자들의 피로와 권태를 전혀 무시하고,단순 반복작업 위주의 직무설계를 한 경우가 이러한 예다. 열악한 노동환경,높은 산재률,빈번한 직업병 발생,권위주의적이고 비민주적 노무관리도 큰 문제다.
이런 속에서 보람으로서의 노동관,긍지로서의 직업관은 쉽게 생길 수 없다.
따라서 직무범위의 확대와 다양화,직업규칙의 유연화 등을 통해 근로자들의 자율의 폭을 넓히고,창의성 발휘의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 또한 각종 노동생활의 질향상운동(Quality of Working Life Movement)을 통해 근로자들의 참여의욕을 고취하고,그들이 성취감과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동시에 노사간 의사소통의 활성화,인간존중의 노무관리,민주적이고 개방적이며 생산적인 노사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셋째,「삶과 일」과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국민철학과 사회윤리를 세워야 한다. 불행하게도 우리사회에는 삶과 노동,삶과 직업에 대한 올바른 국민사상과 철학이 정립되어 있지 못하다. 그동안 학교교육과 가정교육은 입시위주의 교육이었고 직업선택은 항상 쉽고 편한 직장우선이었으며,어렵지만 보람있는 직장은 기피되어 왔다. 사회교육을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사회에 많은 종교가 있으나 삶과 일에 대한 올바른 가치·사상정립을 위해 노력하는 종교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근로자의 성취감 중요
기독교적 삶의 궁극의 목표가 구원이라 할때,이 구원과 직업과의 관계가 우리사회에 명쾌히 정리되어 있는가. 불교적 삶의 지고의 목표가 깨달음이라고 할때,이 깨달음과 노동과의 관계가 우리사회에 명쾌히 정리되어 있는가. 매주의 설교나 설법속에서 이 문제가 얼마나 진지하게 다루어지고,우리의 일상 생활속에서 얼마나 구체적으로 실천되고 있는가. 삶과 일에 대한 올바른 국민사상·국민적 에토스 정립을 서둘러야 한다.
이를 위해 기업인·근로자·학부모·교육자·종교가 모두 힘과 지혜를 모아 공동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학교·가정·사회교육을 통해 확산시켜 우리생활속에 일상화하고 문화화해야 한다 그러할때 우리는 멀지않은 장래에 2차대전후 후진국이 선진국화한 최초의 성공적 사례가 될 것이고,전세계의 많은 개도국들에 희망과 꿈을 줄 수 있을 것이다.<서울대 교수·법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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