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바람부는 독일미술] 下. 헌 집 속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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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는 분단 독일 시절의 아픔을 상기시키는 딱지처럼 자투리 장벽이 남겨져 있다. 총탄 자국과 낙서와 비바람의 흔적이 밴 그 장벽 너머로 분단 시대의 헌 집과 통일 시대의 새 집이 뒤섞여 기괴한 분위기를 풍긴다.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를 부르는 새 수도 건설의 합창 사이로 오히려 '헌 집 다오'를 외치는 이들을 만날 수 있는 게 베를린의 새 풍경이다. 널찍한 공간이 필요한 미술가에게 버려진 공장이나 용도 폐기된 공공 시설물은 맞춤한 스튜디오요 갤러리다. 이런 공간을 접수해 작가들의 작업실이나 전시장으로 쓰는 젊은 미술인들 행진은 지금 독일 현대미술이 세계 미술계로 도약하는 디딤돌이 되고 있다.

베를린 마리안네 광장 근처에 있는 '퀸스틀러하우스 베타니엔'은 병원건물로 쓰이다 비어 있던 낡은 3층 건물을 작가들의 거주형 작업실로 탈바꿈시킨 좋은 예다. 판화 공방이나 설치 작업을 위한 각종 작업장이 붙어 있고, 미술 재료를 싼 값에 공동 구매해 제공하는 등 작가들에게는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는 천국이라 할 수 있다.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작업을 하는 25세에서 35세 다국적 작가들로부터 신청을 받아 1년씩 머물게 하고 전시회를 열어주는 이곳은 독일 현대미술의 산실로 점차 이름이 나 지원자가 늘어나는 추세다.

밖에서 보면 영락없는 공장 지대인 플루트그라벤 3번가의 '쿤스트파브리크'는 독일을 비롯해 터키.인도.뉴질랜드.캐나다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젊은 작가들이 모여 작업하는 공동 스튜디오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방어용 진지였다가 그 뒤 공장으로 쓰이던 걸 크게 손보지 않고 60여 개의 작은 작업실로 나눠 환경은 열악하지만 공장 건물 특유의 높은 천장과 널찍한 창이면 대만족이라는 것이 작가들 말이다. 밖에 나갈 일이 별로 없을 만큼 종일 이곳에서 작업하는 게 즐겁다는 독일인 다그마 빈더는 "매일 이 작업실 저 작업실에서 개인전이 열리는 셈이니 자극도 받고 작품도 더 열심히 하게 된다"며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이 곳이야말로 진정한 현대미술의 공장"이라고 자부심을 내비쳤다.

공장만이 아니다. 베를린 알렉산더광장 지하철 역과 연결된 지하에서는 과거 엄폐 참호로 쓰이던 공간이 전시장으로 변신해 '파라다이스(천국)'란 전시회가 열리면서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문화 공간이 되고 있다. '파라다이스'전을 기획한 토르스텐 뢰머는 "이런 움직임은 뮌헨으로도 퍼져 빈 공장을 접수하는 미술인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빈 집을 작업실과 전시공간을 찾는 작가들에게 돌려주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분배 개념과 맞는 일 아니냐"고 되물었다.

베를린.뮌헨=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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