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 칼럼] 비겁한 정당엔 미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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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당이라면 국가적 현안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고 자기 의견의 관철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 집권을 목표로 한다면서도 정당이 중요 국사에 대해 아무 의견도 내지 않고 눈치만 본다면 집권할 자격이 없다.

*** 국정현안 의견 못내는 제1당

요즘 한나라당을 보면 중요한 국가적 현안에 과연 의견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최근의 가장 중요한 현안이라면 이라크 파병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문제에 관한 한나라당의 당론은 무엇인가. 파병 찬성인가, 반대인가. 찬성이라면 전투병. 비전투병 어느 쪽인가. 규모는 5천명인가, 3천명인가. 파병에 관한 이런 문제에 대해 한나라당의 방침이 뭔지 들은 적이 없다. 고작 최병렬(崔秉烈)대표가 "정부의 구체적 내용이 결정되면 그때 가서 당론을 정하겠다"고 한 것이 전부다. 원내 과반수를 차지하는 제1당이 국가 제1의 큰 문제에 대해 이렇듯 의견도 주장도 없는 것이 정상일까. 파병 문제는 우리 내부에도 찬반이 갈려 있고 한.미 사이에도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정부는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을 맞아 정부안을 통보했다고 하지만 미국 측은 최종 발표를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우리 측은 우리 안(案)에 대해 미측이 감사의 뜻을 보내왔다고 했지만 미측은 의무.공병부대는 미국에 부담만 된다고 말한다. 정부 내의 동맹파와 자주파의 갈등이 심각하다는 얘기도 들린다. 국민의 입장에선 정부가 미국에 통보한 내용이 뭣인지, 그것이 최종안인지 알 길이 없다. 파병을 둘러싸고 이런 혼선, 갈등, 불투명, 한.미 이견 등이 두드러졌는데도 보고만 있는 게 제1당이다.

아마 한나라당의 속셈은 뻔할 것이다. 파병을 지지하고 싶지만 반대 여론이 드높다. 전투부대 파견론자가 많지만 역시 반대 여론이 높고 빈발하는 테러도 겁난다. 자칫 잘못 입을 열다가는 표가 달아난다는 계산이다. 그래서 당면 최대 현안에 대해 주견도 정책도 없이 눈치만 살피는 게 아닌가. 한마디로 비겁한 것이다. 무엇이 국익인가 하는 판단이 선다면 다소의 인기 하락을 무릅쓰고라도 국익을 추진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정당의 정체성이 확립되고 국민도 믿을 수 있게 된다.

한나라당이 비겁하게 보이는 일은 그 밖에도 많다. 예를 들어 부안 문제에 대한 한나라당의 당론은 뭔가. 그 곳에 원전수거물 관리시설을 짓는 데 찬성인가, 반대인가. 국익을 위해 어떤 결정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필자의 기억으로는 이런 문제에 관해 한나라당이 의견을 낸 일이 없다. 부안과 농민.노동자들의 잇따른 과격시위로 큰 불상사가 났지만 한나라당 간부회의에서 이런 문제가 의제로 올랐다는 얘기도 없다. "과격 시위는 안 됩니다"는 확실하고도 분명한 소리를 못 내고 있다. 역시 표 떨어질까 겁내는 것이다.

행정수도 문제나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FTA) 문제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의 당론이 무엇인지 알기가 어렵다. 지난 대선 이후 한나라당의 공식입장은 행정수도 반대였다. 그 당론을 그후 변경했다는 아무 소식이 없었는데도 최근에는 찬성 또는 묵인 쪽으로 슬그머니 방향을 돌린 것 같다. 반대하다간 충청도 표가 다 떨어진다는 계산인 것이다. 그러나 내부엔 출신 지역별로 의견이 엇갈려 당론다운 당론이 없는 것 같다. FTA에 대해서도 눈치만 보고 있다. 많은 당내 인사들은 빨리 국회동의를 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내 농촌 출신 의원들은 선(先)농촌대책을 주장하며 세월만 보내고 있다. 국익을 위해 협정이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농민 표가 떨어질까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 눈치만 보다간 집권기회 안 와

이처럼 많은 중요한 국정 현안에 대해 한나라당은 줏대도 없고 국익 판단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자기 의견이 없으니 정부에 따끔한 충고도 못하고 야당이 해야 할 바른 말도 안 나온다. 그저 정부안이 나오면 흠을 찾고 문제점을 지적하는 반사이익만 노릴 뿐이다. 특검법을 대통령이 거부하면 장외투쟁을 하겠다는 것도 떳떳하지 못하다. 수사 정국에서 그저 살아남으려는 발버둥처럼 보인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장외투쟁인가. 부분적 비인기를 각오하고라도 국가적 차원에서 국익을 추구하는 모습이 없는 정당에 미래는 없다. 비겁해서는 결코 집권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

송진혁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