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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노의 권좌가 흔들린다/필리핀 정국에도 화산재 강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화산피해에 참모들과도 불화/이멜다의 귀국문제도 큰 부담
잔여임기 11개월로 이미 집권말기의 레임덕현상을 겪고 있는 필리핀의 아키노대통령이 피나투보화산폭발로 인한 경제적 타격과 참모들과의 불화 등으로 권력표류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아키노 대통령은 그동안 잦은 군사쿠데타 기도와 공산게릴라들의 준동,만성적인 경제침체에도 불구,비교적 무난하게 필리핀을 이끌어 왔다는 평가를 받아왔었다.
그러나 최근 피나투보화산폭발피해가 예상이상으로 심각한데다 비서실장의 사임,이멜다여사의 귀국시도등 정치적 악재까지 겹치면서 아키노정부는 급속도로 무력해지고 있다.
아키노정부에 결정타를 가하게된 피나투보화산폭발은 지난달 9일 대규모 분출활동을 일으키면서 시작됐다.
6백11년만에 활동을 재개,지난달 9일 시작한 피나투보화산폭발로 필리핀경제는 단기적인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지난해 7월 루손섬에서 발생한 대지진과 11월 비사야지방에 몰아닥친 태풍으로 가뜩이나 피폐해진 필리핀경제가 피나투보화산으로 결정타를 맞은 것이다.
피나투보화산폭발이 몰고온 피해는 국민총생산(GNP)이 4백20억달러에 불과한 필리핀 경제규모에 비춰볼 때 엄청난 규모다.
필리핀 국가경제개발청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피나투보화산폭발로 인한 총피해액은 28억6천만페소(약 1억1천만달러)로 일단 집계됐다.
그러나 현재도 화산활동이 계속되고 있는데다 장기화될 가능성도 큰 것으로 관측되는 만큼 피해액은 1백60억페소까지 늘어날 것이라고 현지 경제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논과 밭에 화산재가 최고 수십㎝씩 쌓이는 바람에 피나투보화산이 위치한 루손섬의 경우 농부 65만명이 일손을 놓고 있는 상태다. 화산인근의 앙헹레스시,오롱가포시 등도 화산재로 전기가 끊기고 은행·상가가 문을 닫아 폐허의 도시로 변했다.
피나투보화산의 분출활동은 필리핀경제에 상당한 도움을 주는 미군기지협상문제와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그 파장이 만만치 않다.
필리핀정부와 미 국방부는 미 제13공군사령부인 클라크공군기지와 미7함대의 보급·정비기지인 수빅만 해군기지의 임대기간연장문제를 놓고 지난 1년동안 마라톤협상을 벌여왔다.
미국측은 10년장기임대에 연간 5억5천6백만달러의 기지사용료를 지불하겠다고 제의한 반면 필리핀은 임대기간 7년에 연간 기지료 8억2천5백만달러를 요구,협상이 난항을 겪어왔다.
그러나 피나투보화산으로부터 반경 1백50㎞ 이내에 위치한 두군사기지가 화산폭발로 인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됨에 따라 협상분위기는 일변했다.
미국의 체니 국방장관이 필리핀내 미군기지 영구이전문제를 거론하는등 필리핀내 미군사기지의 전략적 효용성이 전면 재검토되기 시작한 것이다.
만일 필리핀내 미군기지가 축소·폐쇄된다면 미군기지로부터 막대한 경제적혜택을 누렸던 필리핀은 엄청난 손실을 입게될 것이 확실하다.
한편 정치권내부의 지각변동도 화산활동에 못지 않은 굉음을 내며 움직이고 있다.
뛰어난 업무처리능력과 호감가는 생김새로 「아키노의 원더보이」란 애칭을 얻었던 오스카 오르보스 대통령비서실장(40)이 지난 5일 전격 사임한 일도 이같은 정치권의 균열을 가시권으로 끌어낸 것으로 지적된다.
오르보스의 표면적인 사임이유는 유가인하·수입세철페 등을 둘러싸고 경제각료들과 불화를 빚어왔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아키노정권의 수명이 다했다고 판단한 오르보스가 차기 대통령선거를 노리고 이미지관리차원에서 사임했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미망인 이멜다의 귀국문제도 아키노 대통령에겐 정치적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아키노 대통령이 이멜다가 귀국하는 경우 구속한다면 이멜다가 정치적 순교자로 부각될 공산이 크며,그대로 내버려두자니 내년 선거에서 야당을 적극지원하고 나설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정치평론가들은 이미 안팎 곱사등이가 돼버린 아키노대통령앞에는 두가지 선택안이 놓여 있다고 보고 있다.
하나는 국내문제 전반에 대해 무간섭방임주의를 표방,정국조정에 힘쓴뒤 명예퇴임하는 일이다.
또다른 방법은 아키노 대통령이 대통령재선에 나서지 않겠다던 이제까지의 입장을 번복,적극적으로 정국수습에 나서는 것이다.<진세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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