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원 칼럼] 新행정수도 재고해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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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나는 베를린 시민이다(Ich bin ein Berliner)'.

1963년 고 케네디 미 대통령이 베를린에서 행한 연설 중 한 토막이다. 40년 전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는 세대에게는 아직도 그 여운이 생생한 구절이다. 최근에는 북한을 탈출하는 동포가 점점 많아지고 있지만, 독일에서는 이미 그때부터 동독의 공산독재에서 탈출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소련은 바로 이 자유를 향한 행진을 막기 위해 베를린시를 둘로 갈라놓는 장벽을 설치했던 것이다. 케네디의 레토릭(rhetoric)은 바로 이러한 공산 진영의 도전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선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 월드컵.올림픽 치른 한국 얼굴

베를린 장벽은 마침내 89년 가을에 붕괴됐다. 공산독재가 붕괴된 것이다. 벌써 세월은 10여년이 지났지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분단 독일이 통일되는 과정을 멀리서나마 바라보면서 우리들이 마음속으로 느꼈던 설렘과 희망, 그리고 안타까움은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와서 10여년 전에 있었던 베를린 이야기는 왜 꺼내는가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부가 우리의 수도 서울 대신에 신행정수도를 세우겠다고 하면서 건설공사를 추진하기 위한 특별조치법안까지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독일 통일 과정에서 돋보였던 수도 베를린의 상징성과 그 역할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실 한 나라의 수도는 그 나라의 얼굴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얼굴에서 그 나라의 역사를 읽는다. 독일 베를린은 제국의 수도로 출발해 공화국의 수도, 그리고 나치의 수도를 거쳐 민주국가의 수도로 자리잡았다. 수도는 이처럼 그 나라의 역사를 상징하고 있으면서 구체적으로 수도에 모여 있는 건축물들을 통해 오늘의 세대에게 그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수도는 그 나라의 역사와 의식을 반영한다. 국제사회는 바로 그 나라의 얼굴에서 그 민족국가의 내면화된 과거와 정체성을 읽는 것이다. 파리 없는 프랑스를 생각할 수 없고 베를린 없는 독일도 생각할 수 없듯이 서울 없는 코리아도 상상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서울'을 접어놓고 '신행정수도'를 세워야 한다는 말인가?

서울은 이미 세계에 널리 알려진 수도다. 서울올림픽, 서울월드컵은 말할 것도 없고 서울에서 볼 수 있는 옛 궁들과 각종 문화시설도 이제는 상당한 수준까지 와 있는데 이 모든 것을 대한민국의 수도라고 했을 때와 수도가 아니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받는 인상은 같을 수 없다.

더욱이 우리는 지금 동아시아의 물류중심국가, 아니 경제중심국가가 되겠다고 하면서 이미 수백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세워온 서울을 포기하고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신도시를 수도라고 내세웠을 때 과연 우리를 그렇게 쉽게 중심국으로 인정해 주겠는가 하는 문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 선거공약 언제까지 들먹이나

서울은 우리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도시면서 앞으로 전개될 통일의 역사의 증인이 될 도시다. 서울에는 조선왕조시대로부터 민주화 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기억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통일이 이뤄지는 순간 통일한국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 주는 역할도 서울이 아니면 할 수 있는 다른 공간은 없다.

수도는 살아 숨쉬는 생명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물건이 아니다. 수도 서울은 우리 민족이 흘린 땀과 눈물과 피가 젖어 있는 곳이다. 손쉽게 행정지시로 끝내고 새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마침 '신행정수도' 재고를 촉구하는 국민포럼이 결성돼 다행이다. 정부도 좀더 신중하게 나가기를 바란다. 선거공약이라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야말로 긴 안목과 사료(思料)를 갖고 처리하기를 바란다.

김경원 사회과학원 원장.고려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