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절제의 미학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요즘 '동네북'이다. 그를 비판하는 미국인이 갈수록 늘고 있다.

24일 상원 외교위에서는 같은 공화당 소속인 척 헤이글 의원이 "대통령에겐 전략이 없다"고 비난했다. 이라크 미군 증원을 골자로 하는 부시 대통령의 새 이라크 전략은 "미군의 생명을 탁구공으로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야유도 했다. 전날 밤 부시 대통령은 국정연설을 통해 이라크 전략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하지만 하루 만에 상원 외교위에선 그걸 묵살하는 결의안이 통과됐다. 헤이글 의원의 독설은 그 과정에서 나왔다.

23일 노무현 대통령의 신년 특별 연설처럼 TV방송의 황금시간대에 방영된 부시 대통령의 국정연설은 국민에게 감동을 주지 못했다. 인기 없는 대통령이 인기 없는 이라크전 얘기를 길게 꺼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연설이 형편없었다는 지적은 나오지 않고 있다. 야당인 민주당과 언론은 일부 대목을 호평하고 있기도 하다.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각축전을 벌이는 배럭 오바마 상원의원은 "대통령이 드디어 '기후 변화'라는 말을 입에 담은 걸 평가한다"고 했다.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석유의 사용을 줄이고 대체 에너지 개발에 열중하겠다는 부시 대통령의 다짐에 박수를 보낸 것이다.

민주당 대선 주자인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 주지사는 '미국이 이민자를 환영하는 용광로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며 이민 문호를 확대하겠다고 한 부시 대통령을 "적극 도울 것"이라고 했다.

부시 대통령이 그래도 이런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그의 연설에 오기나 남의 탓이 아닌 정책을 담았기 때문이다. 그도 헤이글처럼 자신의 속을 후벼 파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끼겠지만 새해 국정의 방향을 밝히는 연설에서 그런 감정은 조금도 발산하지 않았다. 대신 차분한 어조로 지구촌의 문제와 나라의 살림살이와 민생을 얘기했다. 그런 절제된 모습이 연설의 역효과를 막고, 야당과 국민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반향을 일으킨 게 아닐까. 노무현 대통령이 절제의 미학을 알았다면 그의 입에서 "연설 때 페이스를 잃었다"는 후회의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상일 워싱턴 특파원